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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Dec 03. 2018

쓰기의 어려움

요즘 글을 쓰기 힘들어진 이유

글쓰기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대상화' 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떠한 상황이든. 나는 지난 7년간 많은 사람과 사물을 제물 삼아 글을 쓰고 돈을 벌어왔다. 그 대상에 애정을 갖든, 악의를 갖든 말이다. 직업적으로 정말 많은 사람에 대해 쓰고, 찍고, 누군가가 볼 수 있는 곳에 올렸다.


요즘 회사 업무가 바뀌면서 보고 듣고 찍고 쓰기는 일을 조금 쉬어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일이 조심스러워진다. 누군가를 대상화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수집한 정보와 여러 사람의 견해를 종합해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일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한창 글을 쓸 때는 이런 고민을 조금 놓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의식적으로 그랬다기보다는, 스스로를 지키려는 방어기제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빠른 속도로 기사를 써내야 하는 상황에 주어져있는데 (좋게 말하면) 깊이 고민하고 (나쁘게 말하면)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다면 일하는 매 순간이 고통스러울 거다. 지금에 와 그때를 떠올려 보면 자전거를 타듯, 수영을 하듯 기사를 썼던 것 같다. 한 번 기술을 몸에 익히면 자연스럽게 몸이 기억하는대로 해내지 않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 누구도 탈 때마다 전방 주시, 핸들 조정, 페달 굴리기를 세세하게 고려하며 타지 않는다. 안장에 엉덩이를 대면 자연스럽게 내 몸이 움직인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는 확신이 없어졌다. 예전엔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 내가 이러저러한 루트를 통해 자료를 수집해서 파악을 해 보았으니, 이것이 '옳음'에 가깝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사실 그것은 내가 정답을 정해놓은 다음 그 정답에 부합하는 근거들을 찾는 과정은 아니었을까. 어떤 사안에 대해 '이거다'라고 결정을 내리고 나면 그 판단을 뒤집기란 쉽지 않다. 그 결정대로 머릿속 회로가 움직인다. 왜곡될 소지가 크다. 내가 유독 결함이 많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사람이란 본디 그런 존재가 아닌가 싶다.


대상화를 업으로 삼아온 내가 대상화를 당한 일이 있다. 끔찍하고 불쾌한 경험이었다. 개인정보가 유출되면서 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파편화된 자료를 수집해(명함, 내 소지품, 소셜미디어) 유튜브에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것을 보았다. 추측 중 일부는 사실이었지만 대부분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틀린 사실을 정말인 것처럼 소설을 쓰고 있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소름끼치고 무서웠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런 저런 의견을 주고 받고 있었다. 나는 해명할 곳이 없었고(청와대에 민원을 올릴 것인가?) 하고 싶지도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진흙탕 싸움이 될 게 뻔했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라고 해명해서 얻을 게 뭐 있겠나? 저런 사람이 대단한 사람인 양 추종받고 있는 게 기가찰 노릇이었지만 무의미한 싸움이었다. 그냥 나 혼자 참고, 넘어갔다. 가족들은 휴대폰 번호를 바꾸라고 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고, 대부분의 소셜미디어를 탈퇴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두려워졌다. 나도 혹시 누군가에게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까? 내가 감히 누군가를 대상화해도 되는 것일까?  


대상화를 업으로 삼던 사람들이 반대로 이야기의 '대상'이 되면 무척 힘들어한다.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첫 직장의 기자 선배는 사회적으로 큰 사건 때문에 가족을 잃었다. 연일 뉴스에 그 선배의 가족들이 등장했고, 정치인들이 앞다퉈 조문을 갔다. 선배는 그 사건을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의 면면을 겪었다. 누군가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지만, 정치를 업으로 삼는다는 사람들은 목숨이 끊어지는 시기를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언제쯤 돌아가주셔야 여론이..'라며 말이다. 그 선배는 술자리에서 그 얘기를 하며 치를 떨었다. 올바름을 지향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주판을 튕기는 모습을 똑똑하게 지켜봤으니 말이다. 쓰러져 있던 그분이 숨을 거뒀을 때 그 선배는 장례식장이 아수라장이 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취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조율했다. 카메라를 들고 취재했던 장례 현장의 당사자가 될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 얘길 들으며 대상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숙명에 대해 생각했다. 정답이 없는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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