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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Dec 11. 2019

머쓱하게 고요와 마주하기, 뱅쇼 만들기.

간만에 조용하다. 남편은 출장을 갔고, 티비나 노래를 틀어놓는 대신 고요를 택했다. 혼자 집에 있을 때면 정적과 마주하는 것이 어색해 일부러 무언갈 틀어놨다. 별로 관심도 없는 예능프로그램을 틀어놨다 넋 놓고 보게 되기도 하고, 방해가 되지 않는 음악을 틀기도 하고, 알아듣지도 못할 영어 라디오 방송을 켜놓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아무것도 안 듣고 싶어 졌다. 하루 종일 눈과 귀를 피로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일하는 중엔 내내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고, 러닝머신을 할 때도 유튜브를 켜놓고 눈과 귀를 쓰게 만들었다. 이들도 쉬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소리라곤 가습기가 뿜어내는 얕은 물소리뿐이다.


어제 하루 일을 쉬고 회사에 갔더니 역시나 밀린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은 바쁘지만, 못할 일도 아니다. 월요일 휴가만큼 달콤한 건 없다. 월요일에 휴가를 써놓으면 일요일 밤도 거뜬하다. 지난주 일요일 밤 내가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란 이렇게나 좋은 거구나.


휴가라고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몬드브리즈에 바나나와 케일을 갈아 마시고, 필라테스 레슨을 갔다. 항상 저녁을 먹은 직후 운동을 하다가 아침 공복에 하려니 기운이 없다.(바나나주스는 결코 배를 채워주지 못한다) 엉덩이를 쥐어짜고, 오늘도 여전히 복근 운동을 하고, 선생님의 마사지로 55분 수업을 마쳤다. 수업이 끝나고 쫄래쫄래 슬리퍼를 끌며 집 앞에 새로 생긴 초밥집에 갔다. 회전초밥. 종류 불문 한판에 1700원! 파격적인 가격이다. 퀄리티에 대한 기대는 진작에 접어뒀건만, 기대를 하지 않아도 실망을 할 수 있구나.. 그럭저럭 6판을 먹고 집에 왔다.


진로와인 1500ml를 끓이니 뱅쇼 1L정도가 나왔다.

무얼 해볼까. 간밤에 유튜브에서 본 뱅쇼 만들기가 생각났다. 뱅쇼는 따뜻하게 마시는 와인이다. 끓이고 나면 알코올이 날아가서 술 같은 느낌은 안 들고, 진한 과일차 같다. 요즘 커피를 덜 마시려고 스타벅스에서 뱅쇼를 몇 번 사 먹었는데, 꽤 괜찮았던 기억. 그래, 오늘은 뱅쇼를 만들어보자. 집 앞 마트로 가 오렌지, 사과, 레몬과 진로 와인 3병을 샀다. 베이킹소다로 과일 껍데기를 세척하고(평소엔 이렇게까지 안 하지만 껍질채 푹 끓여내야 하기 때문에 각별히 신경을 써서) 썰어낸 다음, 와인 3병을 붓고 끓였다. 중불로 끓이다가 약불로 바꿔서 30분, 그리고 뜸 들이기. 다 만들고 나니 담을 병이 없어 유리로 된 병을 사 왔고, 적당히 식은 뱅쇼를 유리병에 담았다. 냉장고에 넣어 놓았다가 전자레인지에 1분 정도 데워 마시면 된다.


나의 첫 번째 뱅쇼는 실패인 것 같다. 패인은 잘 모르겠지만, 떫다. 과일을 넣고 끓이기 전 진로 와인이 더 맛있었다. 그래도 공들여 만든 거니 다 마셔야지. 지금도 뱅쇼에 벨큐브 치즈를 먹으며 글을 쓰고 있다. 2019년도 이렇게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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