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책임자이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처음 이 회사에 오고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담당자를 찾는 일이었다. 공무원들의 전화 돌리기처럼 부서 간의 전화 돌리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부서에서 담당을 찾는다는 것은 잘했다고 칭찬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히스토리를 파악하고 귀찮게 하는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관 있어 보이는 부서 담당자한테 메신저로 질문을 하면 '그건 제 담당은 아니고요..' 라며 폭탄 돌리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하나, 둘 셋, 많게는 다섯 개 부서를 돌고 돌다 보면 처음에 그 부서로 돌아오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부서가 많으니 어느 부서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 처음에는 인사팀에 요청을 했다. 마케팅 업무 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니 부서별, 담당자별 업무를 알려달라고. 실제로 그룹웨어에서 직원 이름을 검색하면 해당 업무를 확인할 수 있지만, 한 사람씩 검색해야만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전체 리스트를 달라고 했더니 회사 보안 지침상 불가하다고 한다. 팀장님 결재받고, 인사팀장 합의가 있어야만 줄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이런 걸 팀장한테 얘기하면 일 벌이지 말고 적당히 하라고 하기 때문에 깔끔하게 포기.
처음엔 이런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우선 한 부서에서 한 가지 일을 온전히 진행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 마케팅팀에서 회사 소개 브로슈어를 만든다고 치자. 일단은 모든 영업/구매부서에 양식을 전달해 자료 취합을 하고, 법적인 부분은 법무팀 검토를 받고, 공시 관련된 내용은 경영관리팀 확인을 거치고, 비용 관련해서는 재무팀 합의를 받는다. 브로슈어 용지 관련해서는 원부자재팀 담당자가 조언을 해주고, 표지 디자인은 사내 디자이너 의견도 구해야 한다. 히스토리 체크를 위해 이전 브로슈어를 만들었던 부서를 찾아보니.. 사라졌다. 담당자는 계열사로 적을 옮겨 일부러 미팅을 해서 히스토리 체크를 하고, 회사에 남아있는 관련자한테 이런저런 질문을 해보지만-.. 잘 기억하지도 못하고, 성실히 답해야 할 의무도 없으니 제대로 진행이 안 된다.
업무 분장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여러 팀에서 비슷한 일을 따로 하고 있는 비효율이다. 남의 부서가 한 일에 숟가락 얹기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한 번은 다른 팀 요청으로 우리 팀에서 실무를 진행한 일이 있었다. 그 팀에선 의견만 냈을 뿐 모든 실무적인 업무는 우리 팀에서 했는데.. 그들은 본인 부서에서 업무 진행을 하고 있다고 윗선에 보고를 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우리 팀 예산으로, 우리 팀에서 모든 일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좀 황당했다. 마찬가지로 우리 팀에서 다른 팀 일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경우도 더러 있다. 보고용으로 좋고, 우리 쪽 리소스는 거의 들지 않는 일은 일부러 하겠다고 맡아서 사업부장에게 보고하기도 한다.
담당이 있기는 하지만, 회사에서 잘 된 일은 너도 나도 내가 했다고 나선다. 마케팅을 하다 보면 여러 부서에 의견을 묻고 일부 반영하기 마련인데, 한 마디씩 첨언한 사람들이 '자기가 한 일'이라고 포장하는 식이다. 잘 안 된 프로젝트는 반대다. 모두들 그건 자기 부서에서 한 일이 아니고, 저쪽 부서에서 한 거라고 둘러댄다. 거짓말이라기보다 그것도 맞는 얘기긴 하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잘 되면 내가 한 일이고, 못 되면 남이 한 일이다.
여러 부서에 걸친 일들을 많이 해야 하는 부서이지만, 나는 이게 조금 못마땅하다. 의견이라는 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경우에는 한 부서에서 원칙을 가지고 밀고 나가야 한다. 기계적인 의견 수렴에 몰두하다 보면 방향은 산으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취향을 많이 타는 광고물 같은 건 더더욱 그렇다. 명백하게 틀린 내용이 아니라면 마케팅에서 힘 있게 진행하고, 욕을 먹더라도 제대로 먹고 싶은데 중간 의사 결정 과정에서 사공이 많으니 늘 애매모호한 결과물이 나온다. 의견 수렴이라는 허울 좋은 절차는, 우리 부서에 책임 회피 거리가 되기도 한다. 정부 부처나 지자체에서 만든 광고물의 묘한 촌스러움은 바로 이런 절차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 마케팅 더 잘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제 노하우를 담은 책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