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사에서 두 번째 맞는 경영계획 시즌이다. 올해도 역시 고달프다. 작년 이맘때 퇴사 욕구가 솟구쳤는데 올해도 그렇다. 지금까지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경영계획 수립이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기자 시절엔 기껏해야 연말 정산 기사를 쓰고, 연초가 되면 연간 계획을 수립하는 정도였는데 '경영계획'이라는 건 성격이 좀 다르다. 사업 계획, 예산, 진행 일정, 업계 동향 파악, 시장 전망 등을 근거로 촘촘하게 만들어야 하는 일이라 난이도가 꽤 높다.
매년 10월 초가 되면 관리팀에서 경영계획에 대한 공지가 내려온다. 올 한 해 리뷰를 바탕으로 내년도 예산 계획을 월별로 짠다. 경비예산, 투자예산, 인건비 예산 등. 내가 속한 마케팅팀은 돈 버는 부서가 아니라서 원가 계산 같은 복잡한 일에서는 제외된다. 업무에 대한 핵심 평가 지표(KPI)도 아직까지는 명확하지 않은 편이라, 숫자보다는 정성적인 부분으로 설명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그러다 보니 관리부서에서 태클도 많이 들어온다.
경영계획은 조직의 가장 작은 단위부터 시작된다. 파트/팀에서 월별로 만들어진 테이블에 연간 예산을 짠다. 이 계획을 사업부 차원에서 취합하고 관리팀에서 검토를 한다. 경영계획은 우리 팀이 예산을 따내기 위한 전쟁이다. 이미 진행했던 업무라 비용 산출 근거가 명확하다면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신규 업무의 경우 예산을 러프하게 짤 수밖에 없는데 관리부서에서는 하나하나 붙잡고 물어본다. 작년에는 이런 일련의 절차가 처음이라 너무 당황스럽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는데 올해는 그래도 한 번 해본 일이라고 조금 낫다.
사업부에서 검토하고 나면 실 차원에서 또 리뷰를 하고, 최종적으로는 CEO와 CFO의 승인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CEO는 이 계획을 그룹 회장에게 보고해 컨펌을 받는다. 조직에서는 점 같은 존재인 나로부터 시작해서 회장까지 차례로 올라가는 체계다. 그렇게 3개월에 걸쳐 경영계획을 수립하고, 1월부터 실행에 나선다.
큰 조직에 오면 모든 업무가 프로세스대로 진행된다. 내부 결재가 문서로 남아있지 않으면 단돈 500원이라도 집행할 수 없다. 100만 원 쓴다고 했다가 95만 원 쓰면 또다시 결재를 올려야 한다. 왜 100만 원이 아니라 95만 원을 쓰게 되었는지 경위를 작성해서 관련 업체로부터 합의서도 받아야 하고, 내부 품의도 다시 진행해야 한다. 우리 팀장 결재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사업부장 결재도 필요하고, 난공불락의 재무팀장 합의도 받아야 한다. 그러니 아주 작은 돈이라도 집행할라치면 짧게는 1주일, 길게는 한 달이 걸린다. 내부 대금 지급 기준에 따라 비용 청구월 익월 말에 대금이 지급되니, 실제로 우리와 일을 진행한 업체가 대금을 수령하는 건 2달이 지나서다.
이 모든 과정을 외부에서 바라보면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다. 그저 '저 회사는 참 답답하게 일한다'는 감만 있을 뿐이다. 물론 내부에서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이지만 시스템 속에 들어와 있으면 점차 이유는 납득이 된다. 나를 물고 늘어지는 관리팀, 재무팀, 법무팀 직원들도 결국 직장인일 뿐이다. 나에게 악의를 품어서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다 본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다.
이 단순한 이치를 이해하고 나면 일이 한결 쉬워진다. 바꿔 말하면 그들도 본인들 선에서 문제 생기지 않을 정도로만 자료를 만들어주면 큰 문제를 삼지 않는다. 정말로 문제가 일어나느냐 그렇지 않느냐보다도, 본인 선에서 보았을 때 발견할 수 없는 이슈라면 그들도 굳이 찾아서 나를 괴롭히지는 않는다. 그러니 적당한 선에서 증빙 자료와 근거를 제시해주면 무탈하게 넘어갈 수 있다.
이 모든 걸 머리로는 알아도 피곤하다. 매주 이어지는 보고, 보고, 보고,.. 한번 만든 문서를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비슷한 말을 조금 바꿔서 또 다른 보고서로 만들고. 끊임없는 문서 만들기의 연속이다. 지친다.
제니의 첫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마케팅 부서 발령을 받았습니다. 5년간 기자로 일했기에 홍보 업무에는 자신이 있었고, 마케팅이라고 뭐 다를 게 있겠나 싶었습니다. 오만한 생각이었습니다. 누구나 마케팅을 말하지만. 진짜 체계적으로 잘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며, 매우 전문적인 분야입니다. 5년차 마케터인 제가 감히 '전문가'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여러분과 같은 위치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들을 책에 담아 보았습니다. 너무 기본적이라 주변에 물어보기도 부끄럽고, 인터넷에 검색해 보아도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았던 부분들을 최대한 모아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