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전 11시 30분. 전화벨이 울렸다. 나의 담당 파트너(일반 회사에서는 본부장급의 임원)였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이 선생, 내가 지난주에 ㅇㅇ 프로젝트 지원 나가라고 얘기 안 했었나?"
"예, 말씀 없으셨는데요."
"아.. 내가 메일을 써놓기만 하고 보내기 버튼을 안 눌렀네. 미안해요. 이번 주 1주일만 그 프로젝트 지원해 주세요. 프로젝트 팀장한테 얘기해뒀어요. 아마 만만치 않을 거야."
우리 본부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프로젝트였다. 입사 전 워크숍에서 내 옆 자리에 앉은 동료가 그 프로젝트 담당이었는데, 6개월간 새벽 3시에 귀가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다른 프로젝트로 옮긴다고 했다. 그 프로젝트만 꼭 피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일이었다.
체념하고 있던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프로젝트 팀장이었다.
"점심시간 다 되었으니까, 천천히 식사하시고 6층 회의실로 오세요. 우리도 아직 안 먹어서요."
알았다고 하고 12시 30분쯤 회의실로 갔다. 미리 가서 앉아있으려 했는데 다들 아직 자리에 있었다. 벌써 먹고 온 건가 싶었는데 배달음식이 왔다. 다들 한 마디도 안 하고 제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노려 보며 밥을 먹었다.
근황을 들어보니 보통 새벽 2-3시쯤 퇴근 중이라고 한다. 주말에도 출근하고, 이틀에 한번 집에 들어가는 일도 있다고 한다. 다들 나의 이전 프로젝트에 대해 물어보길래 밤 10시, 늦으면 11시쯤 퇴근했다고 답했더니 모두들 부러움의 눈초리를 보냈다.
"10시에만 집에 가도 정말 좋겠다. 집에 가서 운동도 하고, 넷플릭스도 보고, 얼마나 좋을까” 밤 10시 퇴근이 부러움의 대상이라니, 이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주 52시간은 다른 나라 얘기다.
컨설턴트에겐 시간이 없다. 아무도 새로 온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차근차근 알려주지 않는다. 알아서 적당히 눈치로 때려 맞추어 지난 몇 개월간 일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혜원 선생님, 우선 여기 PPT에 데이터 다 고쳐야 하니까 엑셀 피벗에 뽑아놓은 국가별 캠페인 기간, 이전 기간 매출 보시고 다시 입력해주세요."
프로젝트 폴더를 보니 엑셀 파일이 20개쯤 있고, 각각의 파일엔 10개씩 시트가 있다.(최종_최종, 진짜 최종, master, raw, total,...) 뭘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글로벌 프로젝트라 모든 자료는 영어로 되어있다. 다들 바쁘게 일하는데 물어볼 분위기도 아니다.
조용히 옆에 있는 대학생 인턴에게 물었는데, 한국말이 조금 어색하게 들린다. 외국에서 계속 살다 한국에 온 지 몇 년 안 됐다고 한다. 한국인이 쓰는 영어 발음이 아니라 진짜 외국인 발음이라 단어도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귀를 쫑긋 세우고 시키는 대로 자료를 고쳤다.
밤 12시가 되었다. 프로젝트의 리더인 PM은 우리들에게 업무를 주고 집에 갔다. 나도 짐을 싸서 동료들에게 먼저 가보겠다 하고 나왔다. 다음날 물어보니 2시쯤 퇴근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수요일 밤 9시다. 나는 지금 시각에 퇴근하는 것을 감사하게 되었다. 이렇게 일찍 집에 가도 되나 싶다. 다른 팀원 5명은 아직 사무실에 남아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내가 맡은 구역을 끝냈으니 나왔다. 내 프로젝트도 아니고 1주일간 지원을 나온 거라, 할 일 마쳤는데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직 수요일인 게 믿기지 않는다. 이 프로젝트를 같이 한지 2주는 된 것 같은 게 고작 3일 차라니.. 회사에는 우리 말고도 많은 동료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오늘은 내가 일찍 퇴근해서(9시에) 마음이 너그러워서인지, 그런 동료들을 보며 이렇게 열심히 사는 청년들이 많구나 감탄했다. 주 52시간제가 준수되는 회사에 계속 다녔다면 아마 나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을 것 같다. 2022년에도 이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