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 먹으며 보세요
1.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인간의 전유물은 아닌가 보다. 마르탱 모네스티에라는 프랑스 언론인이 쓴 『자살백과』에 따르면 동물도 자살을 한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중 「고양이의 자살」에 실린 내용이다.
이 책에 소개된 한 고양이는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투신을 했다. 또 다른 고양이는 바닷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주인이 건져 올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러나 안심하긴 일렀다. 그 고양이는 주인이 방심한 틈을 타 다시 바다에 뛰어들어 결국 자살에 성공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이야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철학적 사유를 하는’ 인간만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자살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살의 속성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양이도 자살을 한다니. 내가 생각해온 자살의 속성이 잘못됐거나, 고양이는 대단히 철학적인 사유를 하는 동물이거나, 둘 중 하나인가 보다.
“이 고양이들이 정말로 명확하게 ‘그래, 자살해버리자’ 하고 결심한 끝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인지 한마디로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고양이들이 그 시점에서 어느 정도 ‘살아갈 의욕을 상실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고양이의 삶에도 나름대로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 터이고, ‘아 사는 게 귀찮아. 이제 더는 아등바등하고 싶지 않아’ 하는 정도는 막연하게나마 생각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고양이의 자살, p.67
자살백과라는 책에 흥미가 생겨 찾아보니 올해 4월 『자살에 관한 모든 것』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어 판도 출간됐다. 무려 400쪽에 달하는, 그야말로 자살에 관한 백과사전이다. 목차를 보니 자살의 이유(치정, 치욕, 희생, 정신병 등)부터 자살하는 사람의 특징, 자살의 장소, 자살 충동을 유발하는 사회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급한 동물의 자살은 ‘참 불가사의한 일들’이라는 부에 들어가 있다.
책의 띠지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후기가 발췌돼 있다. “이 책은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 나는 읽으면서 감탄하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일곱 글자를 뺀다면, 책을 마구 읽고 싶게 만드는 후기는 아닌 것 같다.
2. 무라카미 하루키의 뻔뻔함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젊은 시절 기자와 인터뷰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엉터리로 거짓말을 했다는 이야기다. 작가는 그때의 자신을 “한창 건방지던 젊은 시절”이라고 표현한다. 가령 기자가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느냐고 질문하면 이렇게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글쎄요, 최근에는 메이지 시대의 소설을 읽습니다. 초기 언문일치 운동에 관련된 마이너 작가들을 좋아하는데요, 구와다 마사오나 오자카 고헤이의 작품은 지금 읽어도 몹시 자극적이더군요”
내가 만약 그를 인터뷰하는 중이었다면 짐짓 고개를 끄덕거렸을 것도 같다. 구와다 마사오, 오자카 고헤이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진지하게 말하는 걸 보니 대단한 사람들인가 보다. 일단 적어놓고 이따 인터넷에서 찾아보자, 하는 식이다.
실은 두 작가 모두 무라카미가 꾸며낸 가상의 인물이다. 지금이야 웹서핑 한 번이면 진위여부를 가려낼 수 있지만 당시였다면(아마 1980년대 초반이겠지) 쉽지 않은 일이다. 마감이 촉박했다면 진짜 작가인 줄 알고 그대로 기사를 썼을 수 있다. 아, 얼마나 망신스러운 일인가. 감정이입을 하고 보니 내가 괜히 괘씸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무라카미 본인은 “얼렁뚱땅 지어내 대답을 하는데 능하다”며 너스레를 떤다. 못 말려, 정말.
3. 주제로 보면 먹는 얘기가 가장 많다. 일본식 전골인 스키야키, 김밥, 장어, 도넛, 크로켓, 지라시 초밥, 블러디 메리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읽다 보면 배가 고파진다. 나는 파스타를 먹으면서 봤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2003)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오하시 아유미 그림 / 권남희 옮김
도서출판 비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