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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Dec 10. 2015

애프터 다크

잠 자기 전에 읽으세요

1. 전형적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프터 다크를 읽으며 지금까지의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형식적인 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소설들이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더 길게는 수십 년을  가로지르는 반면 이 책은 고작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얘기다.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처럼. 그래서인지 길이도 짧은 편이다.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은 달고 있지만 중편쯤 되지 않나 싶다.


또 한 가지, 전형적인 남녀 간의 사랑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눈에 띄게 예뻐 반짝반짝 빛이 나는 언니(에리), 그런 언니에 대한 반작용으로 여성스러움을 거부하면서도 한편으론 언니를 동경하는 동생(마리)의 이야기다. 중년 아저씨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자 형제들이 크면서 느끼는 오묘한 감정들을 잘 잡아냈다. 에리&마리 자매의 성장기 같기도 하다. 극 중 에리는 잠을 자느라 말은 거의 하지 않지만.


언제나 그랬듯 SF적인 요소가 가미돼 있다. 언니인 에리는 아름답게 사는 일에 너무 지쳤는지 어느 날 갑자기 "잠을 좀 자야겠어"라더니 몇 달 동안 내리 잠만 잔다. 죽은 건 아니지만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다.



2.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든,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 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 쪼가리잖아? 불은 '오오, 이건 칸트잖아'라든지 '이건 요미우리 신문 석간이군'이라든지 '가슴 끝내주네'라든지 생각하면서 타는 게 아니야. 불 입장에선 전부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 그거랑 같은 거야.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애프터 다크』 p.202


기억이 연료라는 그럴듯한 비유와 함께, 무라카미 하루키의 유머도 묻어난다.



3. 하나의 책, 두 개의 번역본


2004년에 나온 번역본 『어둠의 저편』(임홍빈 번역 / 문학사상 펴냄)을 다른 번역가와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펴냈다. 책 제목을 영어로 바꾸는 바람에 같은 책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꽤 되는 것 같다.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 문체가 꽤 다르다. 같은 대목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면,



"네, 전혀 못했죠. 하지만 아직 어렸고, 친구도 많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말은 금방 배웠어요. 아무튼 꽤 느긋한 학교였어요." 『어둠의 저편』  p.79


"네. 한 마디도 못했어요. 그렇지만 워낙 어렸기도 하고 옆에서 친구가 도와줘서 말은 금방 배웠어요. 좌우지간 느긋한 학교거든요." 『애프터 다크』  p.69


"내가 사회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진학 목적의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장래엔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업인이 되기를 기대하셨거든요. 역할 분담이라고나 할까, 우리 부모님은 백설공주처럼 예쁜 언니와, 머리 좋은 수재인 동생, 뭐 이런 걸 기대하신 거죠." 『어둠의 저편』 p.79


"입시 명문고에 가서 장차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을 갖기를 저한테 기대하신 거죠. 역할 분담이랄지……. 백설공주 같은 언니랑 수재 동생."  『애프터 다크』  p.69




4. 머리맡에 두고 잠 자기 전에 읽으면 잘 어울려요.





『애프터 다크』(201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도서출판 비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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