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만큼 의무 엄격한 코펜하겐 자전거 정책
나를 들뜨게 만든 사진 한 장이 있었다. 폭설이 내리는 덴마크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저렇게 눈이 오는데 왜 굳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할까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드는 거다. 그 사진을 올린 사람에 따르면 자전거 이용이 일상적인 덴마크에서는 당연한 일이란다. 자전거 애호가로서 놓칠 수 없는 기회다. 나도 덴마크에 가서 자전거를 타겠노라 다짐했다.
나는 못 말리는 자전거 애호가다. 웬만한 거리는 자전거로 이동한다. 때로는 웬만하지 않은 거리도 무리해서 가려다 사서 고생을 하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엔 일회용 우비를 입고 자전거를 탄다. 길이 미끄러워 위험하긴 하지만 가랑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건 꽤나 즐거운 경험이다.
기차를 타고 코펜하겐역에 도착했다. 역을 빠져나오자 수백, 혹은 수천 대의 자전거가 주차돼 있었다. 여기가 바로 자전거 천국, 덴마크였다. 주덴마크 대사관 자료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코펜하겐의 자전거 수는 약 56만대로 코펜하겐시 인구(55만명)보다 많다. 코펜하겐의 자전거 수송분담률, 즉 자전거를 이용한 출퇴근과 통학비율은 50%에 달한다. 자동차(32%)나 대중교통(26%) 보다 자전거를 통한 출퇴근 비율이 더 높다.
덴마크에선 국회의원들도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다.
그만큼 국회의원들이 허례허식이 없다는 얘기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일상적인 수송수단이라는 뜻도 된다. 반면 한국의 자전거 수송분담률은 2012년 기준 2.2%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국회의원 같은 건 상상하기 어렵다. 아마 한국에 그런 국회의원이 있다 해도 쇼맨십을 부린다며 좋은 소리는 못 들을 터다.
다시 코펜하겐으로 돌아와서. 그곳 사람들은 정말 일상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동호회원들이 여가로 타는 것이 아니라 이동수단으로의 자전거다. 코펜하겐에는 자전거를 타기 위한 모든 조건들이 갖춰져 있었다. 첫째는 자전거 전용도로. 코펜하겐시의 면적은 88㎢인데 자전거도로의 길이가 411㎞다. 모든 길에 자전거도로가 있다고 보면 된다. 이곳의 자전거도로는 한국처럼 ‘자전거를 타도 되는 곳’이 아니다. ‘자전거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진행방향을 엄격히 지켜야 하며, 보행자가 이곳을 이용해서도 안 된다. 처음 덴마크에 도착해서 자전거를 타다 다른 운전자로부터 날 선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봐! 당신 지금 역주행하고 있잖아!” 진행방향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나는 황급히 자전거를 끌고 인도로 빠져나와야 했다.
자전거 신호등·라이트 장착 의무화…벌금 최대 14만원
코펜하겐에는 자전거를 위한 신호등도 따로 있다. 자동차, 보행자와 함께 자전거도 교통의 주체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코펜하겐시가 소개하는 자전거 이용의 장점이다.
자전거는 코펜하겐 사람들의 일상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출퇴근, 외출, 장비 운반, 여가생활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자전거로 이동하는 것은 도시를 이동하는 가장 빠른 방법인 동시에 환경친화적이다.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는 법.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 만큼 지켜야 할 것도 많다. 자전거 신호를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 자전거 라이트 장착도 의무화돼 있다. 자전거를 멈추거나 방향을 바꿀 때는 수신호를 통해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 어린이 전용 시트가 장착된 경우를 제외하면 한 자전거에는 한 사람만 탑승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탄 채 보행자도로를 이용하는 것도 금지돼 있다. 시에서 정한 자전거 법규를 어길 시에는 700~1000크로네(약 10만1000원~14만4000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코펜하겐시는 자전거 운전자들에게 안전모 착용을 권장하고 있지만 의무사항은 아니다. 코펜하겐에서 안전모를 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현지인에게 왜 쓰지 않느냐고 묻자 그리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란다. 실제로 코펜하겐의 연간 자전거 교통사고 사상자 수는 2010년 기준 92명(사망자 3명)으로, 시 차원에서 적극적인 자전거 정책을 펴기 시작한 이래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반면 같은 기간 서울의 자전거 교통사고 사상자 수는 3075명(사망자 34명)이다. 2007년 1951명(사망자 25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대폭 늘었다.
자전거 등록하면 분실 시 법적 보호…정기 대여 시스템도
덴마크 자전거는 등록제다. 자전거를 사면 경찰서에 가서 등록을 하고 타야 향후 분실했을 때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자전거가 없는 사람은 빌려서 탈 수 있다. 여행자는 물론 현지인들도 이용하는 대여 시스템이다. 내가 자전거를 빌린 곳은 고바이크(byogpendlercyklen.dk)라는 곳이다. 스마트폰으로 홈페이지에 접속해 회원가입을 해도 되고, 자전거에 달려있는 내비게이션으로 해도 된다.
자전거 대여료는 한 시간에 3000원 정도.
덴마크의 무시무시한 물가를 감안하면 저렴한 편이다.
무엇보다 이 자전거의 좋은 점은 전기자전거라는 것. 전기자전거란 평지에서는 일반 자전거와 똑같이 달리다가 오르막길에서는 전기모터가 작동해 편안하게 오를 수 있는 자전거다. 한국에서도 타 보고 싶었지만 비싼 가격 탓에 군침만 흘리고 있었는데 덴마크에 와서 운 좋게 타 볼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이 자전거에는 내비게이션도 장착돼 있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과 마찬가지로 GPS를 통한 현재 위치 표시와 길 찾기, 주변 검색 등이 가능했다.
모든 것이 준비됐다. 그런데 막상 타려고 보니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대여 자전거는 장신(長身)의 북유럽인들에게 맞춰져 있는지 안장이 너무 높았다. (나도 170cm면 작은 키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다리를 쭉 뻗으면 발이 페달에 닿을 듯 말듯했다. 안장 높이를 조절해 보려 했지만 힘이 부족해서인지, 요령이 없어서인지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멀리서 연인인 듯 보이는 남녀 한 쌍이 걸어오기에 도움을 청했다. 여기 자전거를 처음 타 봐서 그런데 안장 낮추는 것을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남자 쪽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팔을 걷고 나섰다. 그런데 생각만큼 안장 조절은 잘 안 됐다. 여자는 “너 근육 좀 키워야 되는 거 아니야?”라며 비웃었고 남자는 “시끄러워(Shut up)”라며 민망해했다. 나도 웃음이 났지만 도움을 청하는 입장인지라 짐짓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결국 근육이 부족한(?) 남자의 도움으로 덴마크에서 라이딩을 즐길 수 있었다는 해피엔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