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대통령 집 앞에 포스터 붙인 팝아티스트
정치인을 풍자 중인 팝아티스트 이하 씨에게 오늘 대법원이 벌금 10만원의 선고유예를 확정했다. 2012년 5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 앞에 풍자 포스터를 붙인 행동은 경범죄 처벌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재판부는 예술의 자유는 공공복리를 위해 제한할 수 있다면서 벌금 10만원의 선고 유예를 확정했다. 10만원이라는 벌금보다 중요한 건 예술 표현의 자유에 대한 판례가 생겼다는 점이다. 2012년 8월 이하 작가를 인터뷰했던 내용을 소개하려 한다.
경찰이 묻더라 “배후가 누구냐”고
예술가의 권리, 표현의 자유
날카로운 풍자 속엔 말랑말랑한 인간애가…
“사람들이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했던 정치인들을 풍자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대중들이 청량감을 느끼고 스트레스가 풀린다면 그걸로 족해요.”
#1. 5.18을 하루 앞둔 5월 17일, 서울 연희동 주택가 담장에 전두환 전 대통령 그림을 붙인 예술가가 경찰에 붙잡혔다. 그림을 보자. 분홍색 수갑을 찬 전두환 대통령의 손에는 29만원 짜리 수표가 들려 있다. 전 전 대통령을 풍자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보이나 그림 자체는 화려하고 예쁘다. 꽃이 흩날리는 배경에 하늘색 후디를 입은 그의 모습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귀여운 독재자(pretty dictator)’ 시리즈 중 하나다.
#2. 지난 6월 28일, 백설공주 옷을 입은 박근혜 의원 포스터가 부산의 버스정류장, 택시 승강장 등 시내 곳곳에 붙었다. 그림 속 박 의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진 사과를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배경에는 청와대가 보이고 하늘에는 나비들이 노닌다. 이 그림을 그린 이 역시 한 달 전 포스터를 붙였던 그 예술가, 이하(44ㆍ본명 이병하)씨다. 그는 대선 후보를 비방하는 그림을 게시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기다리고 있다.
경찰이 묻더라 “배후가 누구냐”고
이하 작가를 만난 건 박근혜 의원이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지난 20일 오후였다. 그는 자신이 만약 박 의원이라면 그런 식으로 대처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했다.
“팝아트란 원래 장난스러운 거예요. 그럼 유머로 받아들여야죠. 만약 저라면 화가에게 전화를 했을 거예요. 예쁘게 그려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대응한 것이 알려지면) 지지율이 최소한 5%는 올라갈 걸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의 그림을 붙인 두 사건은 이하 작가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특히 젊은 층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정작 작가는 유명세나 돈벌이에는 관심이 없는 눈치다. 일각에서는 유명해지기 위해 이런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냐고도 하지만 그는 “이렇게 화제가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작품도 전시 중이다.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스튜디오 겸 카페인 대학로 ‘벙커 1’에서다.
“‘귀여운 독재자’는 독재자들이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는 시리즈예요. 사람들이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했던 정치인들을 풍자하는 거죠. 대중들이 청량감을 느낀다면 그걸로 족해요. 작업 목표는 달성한 거죠.”
많은 시민들이 ‘통쾌하다’, ‘재미있다’고 호응했으나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부산진구 선거관리위원회는 그가 공직선거법 제93조 1항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법의 칼날을 들이댔다. "선거일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해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 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거나 정당의 명칭 또는 후보자의 성명을 나타내는 광고, 벽보, 사진, 인쇄물 등을 배부, 게시할 수 없다"는 것이 조항의 내용이다.
“부산에 박근혜 의원 그림을 붙인 게 6월 28일입니다. 대선 출마 선언을 하기 열흘 전이었죠. 그러니 벽보를 붙였을 당시에는 선거법이 적용될 수 없어요. 후보도 아닌 사람을 비방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렇게 따졌더니 경찰에선 (대선 후보가 될 거라는 것을) 전 국민이 알지 않았느냐고 해요. 미래 일을 추측해서 현재의 법에 적용한다? 글쎄요. 경찰들도 어쩔 수 없대요. 위에서 그렇게 내려오는 거라.”
전 전 대통령의 집 근처에 벽보를 붙였다 잡혀갔을 땐 특정 정치세력이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다. 경찰에서는 “배후가 누구냐”, “누가 돈을 대줬냐고” 캐물었다. 검사가 전시장에 직접 찾아와 그림을 내리라고 요구한 일도 있었단다. 때문에 화랑 대표가 그림을 창고에 숨겨놓고, 이하 씨가 다시 전시장에 나와 그림을 걸어놓은 적도 있다고 했다.
예술가의 권리, 표현의 자유
그를 만나면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두렵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예술가 혼자 너무 큰 존재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맨 처음 길에 그림을 붙인 게 작년 12월이었어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무섭더군요.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요. 이명박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을 붙이고 있는데 젊은 신사 분이 무척 좋아하며 대통령의 별명을 불렀어요. 그때 느꼈죠. ‘아, 사람들이 좋아하는구나’라고요.”
올해 5월 광주에서 전시를 했을 때는 광주 시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고 했다. 작품은 한 점도 못 팔았지만 시민들이 전시장에 와 “이런 걸 해줘서 고맙다”며 용기를 북돋아줬단다. 새벽에 벽보를 붙일 때는 주로 택시 기사들을 많이 만난다.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건네며 응원해 주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왜 이런 걸 하냐며 따지는 사람은 없었단다.
“예술가는 정치인 얼굴을 그릴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자유롭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죠. 표현의 자유는 숭고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자꾸 죄를 묻고 못 하게 하려고 해요. 구설수에 오르고 풍자의 대상이 되기 싫었다면 애초에 정치인이 되지를 말았어야죠. 아니면 잘 하던지. (웃음)”
혼자 고군분투하는 예술가에게 도움을 주겠다며 손을 건네는 단체도 많다. 정당, 예술가 모임, 인권운동 단체까지 다양하다.
“지지 성명이나 모금운동을 해주겠대요. 고맙지만 모두 거절하고 있어요.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순수성을 잃기 때문이에요. 그럼 더 이상 이 일을 할 수 없죠. 예술가란 철저히 독립적이어야 해요. 가령 제가 지금 벙커 1에서 전시를 하지만 나꼼수 멤버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언제든 풍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털복숭이!’(나꼼수 진행자 김어준을 지칭)라면서요. (웃음)”
날카로운 풍자 속엔 말랑말랑한 인간애가
정치인을 풍자한다고 하니 정치적이고 단단한 사람일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감정이 북받친 듯 간간이 말을 잇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게 된 건 미국에서였어요.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 중 카다피를 그려놓은 것을 보고 한 루마니아 아주머니가 전시장에 들어왔어요. 꼼꼼히 그림을 살펴보더니 제게 말을 걸어왔어요. 루마니아 독재자인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를 그려달라고요. 독재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총살되고 가까스로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을 온 분이었죠.”
이하의 작품을 보고 위안을 받았다는 루마니아 아주머니의 고백은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는 "세상 사람 모두가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으나 일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구조를 만든다"고 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지만 ‘왜’인지는 알지 못하며, 서로를 미워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돼가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전시 초대장에는 그가 해외에서 만난 다양한 이들의 일화가 소개돼 있다. 구템베르그(Gutemberg)라는 이름을 가진 맘씨 좋은 브라질 친구, 가정부로 일하는 뚱뚱한 멕시코 아줌마 릴리아(Lilia), 소녀시대 흉내를 내는 필리핀 간호사 줄리(Julie)까지. 언뜻 보면 공통점을 찾기 어려워 보이는 일화지만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다.
“사람 사이의 상처는 언젠가 치유돼요. 남녀가 사랑하고 상처를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 아물죠. 하지만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아요. 안기부(현 국정원)에 끌려가 피해를 받으면 누가 위로해 주나요? 저는 예술가로서 보여주는 거예요. 작품 속에 메시지를 넣어 시민들과 소통하는 것이 예술의 쓰임새니까요. 그렇기에 예술가는 그 누구보다, 세상 이야기를 해야 하는 존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