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없는 해외여행을 하다

그땐 스마트폰 없이 잘도 여행을 했는데

by 일곱시의 베이글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건지,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라 이런 일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병적으로 기록에 집착한다. 지금도 매일 - 돈을 쓰는 즉시 적고 있으니 매일보단 매 순간에 가깝겠지만 - 가계부를 쓰고 있으며, 다이어트를 할 땐 운동과 먹은 것을 낱낱이 기록한다. 여행을 가면 모든 걸 찍고 기록하는 것은 물론이다.


지금까지 여행은 그랬다. 혼자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노트북을 챙겨갔다. 무언가 눈에 들어오는 족족 찍어댔고, 버스나 기차로 이동하는 틈틈이 사진을 정리했다. 오전 여정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노트북으로 사진을 정리하고 다시 오후 일정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랬다. 사진작가는 아니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소중한 순간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확실히 여행이 끝나고 나면 사진에 찍힌 장면들을 위주로 기억하게 된다. 슬라이드를 넘기며 아, 이랬었지-라며 추억을 곱씹는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굴러다니던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곤 한다. 수년전 여행에서의 특별한 경험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순간인데, 기억 한 구석에 파묻혀 있다 별안간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럴 때면 깜짝 놀라곤 한다. 아 맞아, 그런 일도 있었지, 사진을 안 찍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네.


2014년 여름, 헬싱키에서. 아직도 그리운 이 때의 풍경. ⓒ이혜원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어떤 것이 남을까


이런 경험을 하고 나서 드는 생각은 두 가지다. 첫째는 잊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사진을 찍어야겠다”일 것이고 둘째는 그렇기 때문에 사진을 찍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다. 모순적이지만 그렇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을 한다. 그러나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는 생각도 한다. 사진 위주로 기억을 하다 보니 사진 이외의 경험들은 구멍이 난 듯 빠져버리는 것이다.


사진기 없는 여행은 어떨까도 생각해 봤다. 실천에 옮기기란 쉽지 않다. 어떻게 얻어낸 특별한 여행 기회인데, 그럴 수야 없지. 나야 하는 일의 특성상 언젠가 내 글에 자료사진으로 쓸 수 있다는 이유도 있기는 하다. 별 생각 없이 찍어놨던 사진들도 의외의 순간에 자료사진으로 빛을 발하곤 한다.


핑계일 수 있다. 여행, 특히 해외여행의 기저엔 과시욕이 깔려있다. 누구나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지만 아직도 그렇다. 해외여행을 간다 하면 부러움을 산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직간접적으로 자랑을 해야 한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얼굴은 흐릿하지만 배경은 아주 그럴듯한 - 이를테면 프라하의 고성이라거나 - 사진이라도 한 장 걸어놔야 한다. 아무도 드러내 놓고 이런 얘길 하진 않는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런 욕구가 있음을 인정한다.


2014년 북유럽 여행은 꽤 호화롭게 다녔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했던 때라 여행 내내 호텔에서 묵고 내키면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밥을 먹고, 비싼 클래식 공연도 봤다. 그러다 문득 엉뚱한 가정을 하게 됐다. 내가 이 여행을 했다는 사실을 평생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사진도 찍을 수 없고, 혼자만의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여행을 할까라는 질문이었다.


헬싱키에서, 시벨리우스 콘서트가 끝나고 난 뒤의 풍경. 관람료에는 크랜베리쥬스와 공연CD가 포함돼 있었다. ⓒ이혜원


여행은 온전히 내 만족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다. 견문을 넓히기 위함이라는 그럴듯한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내 주변 사람에게든, 모르는 사람에게든 내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여행의 본질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이다.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적당한 유스호스텔도 괜찮을게다. 레스토랑에서 음식이 나올 때마다 사진을 찍는 대신 그곳 사람들이 밥 먹는 모습이나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좀 더 감상할 수도 있었을 거다. 기차로 도시를 이동할 때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사진을 고르는 대신 바깥 풍경을 좀 더 구경할 수도 있었을 테다. 하염없이 지루하다 할지라도.


먹통이 된 미러리스, 박살이 난 아이폰


최근에 뜻하지 않게 카메라 없는 여행의 기회가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오사카 여행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절대 그럴 계획은 없었다. 고장난 미러리스 카메라를 75,000원 주고 수리했으며, 아이폰도 챙겼다. 그러나 인생이 나의 바람처럼 흘러가지는 않는 법. 공항에 도착하니 미러리스 카메라는 먹통이 됐다. 수리점에 전화하니 다시 제품을 보내면 고쳐주겠노라 했다. 이미 나는 공항에 와 있는데. 카메라는 단념하고 가방 깊숙이 묻어뒀다.


여행 초반에는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었지만 영 못 미더웠다. 아무리 아이폰 카메라가 좋다지만 카메라와는 비교가 안 됐다. 내 불평이 그 물건에도 전해졌는지, 결국 아이폰은 내 손을 떠나 아스팔트로 직행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화면 유리가 산산조각이 난 것은 물론, 내부 디스플레이까지 망가져 아예 폰을 쓸 수 없게 됐다.


핸드폰이 깨지던 날 찍은 사진. 아이클라우드에 백업을 해둔 덕분에 사진은 건졌다. 교토 천룡사 인근. ⓒ이혜원


나머지 일정은 카메라 없이 보냈다. 마음을 비우니 의외로 편해졌다. 구경도 원없이 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예쁜 구도 같은 걸 찾지 않아도 됐다. 폰이 없어진 것도 꽤 큰 변화였다. 앱으로 지도를 볼 수 없으니 기억에 의존해 지하철역과 공항에 찾아갔다.


그러고 보면 6년 전에는 핸드폰 없이 잘도 유럽여행을 했다. 유럽여행 가이드북을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며 목적지를 찾아갔다. 영국박물관에 갈 때는 도대체 몇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었는지 모른다. 헤매기도 많이 했다. 스마트폰은 여행의 모양을 꽤 많이 바꿔 놓았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길을 물을 필요가 없어졌다. 구글 내비게이션이 훨씬 편리하다.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이 동네 맛집이 어디냐고 묻는 대신 옐프(Yelp)나 포스퀘어(FourSquare) 같은 앱을 이용하게 됐다. 그만큼 현지인과 이야기할 기회는 줄었다.


손바닥만 한 물건이 여행의 모습을 많이 바꿔놓았구나 싶다. 언젠가는 카메라도, 스마트폰도 없이 여행을 하고 싶다. 그런 다음 글로만 된 여행기를 쓰는 거다. 사진과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에 가당키나 한 얘기일까? 그래도 나는 글만이 가진 힘을 믿는다. 좋은 글이라면, 글만으로도 누군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설레게 만들 수 있을 거다. 글쟁이에게는 최고의 축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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