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팀이 쓰고 CEO는 읽고…부끄럽고 불편한 현실
홍보팀 막내 A씨는 요즘 고심에 빠졌다. CEO 언론 인터뷰 제안이 들어와 사전 질문지를 받았는데 답변하기 곤란한 질문이 너무 많은 탓이다. 여느 때처럼 답변서 초안은 A씨 몫이다. 실적처럼 답이 나와 있는 것은 손쉽게 쓸 수 있지만, 개인의 철학과 비전에 관한 질문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난감해 죽겠단다. 요즘 그는 궁예가 관심법을 쓰듯 대표이사 입장에 최대한 감정이입을 해 답변서를 쓰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가 코앞인데 상사 결재까지 받아야 하니 오늘도 야근은 확정이다. 그래도 자신이 쓴 답변서 문구가 신문 헤드라인으로 뜬 것을 보면 뿌듯하단다.
홍보실장 B씨는 요즘 외부청탁 원고 작성에 여념이 없다. B기업이 속한 협회에서 CEO 이름으로 된 원고를 써달라는 부탁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본 저명인사의 문구를 몇 개 인용하고, 뉴스를 검색해서 그럴듯한 통계도 몇 개 붙여 넣는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싶다. 지난해 말에는 대표 신년사를 쓰느라 몇 날 며칠 고생을 했다는 그다.
업계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는 일이다. 오너나 대표이사의 어록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말이, 실제로는 재기발랄한 홍보팀 직원의 머리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관행은 조직 규모가 클수록 성행한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조직이 클수록 말 한마디의 영향력도 크다.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조직 차원에서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가끔은 이런 관행이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수장들은 부하직원이 읽어준 원고를 읽고, 기자들은 그 말로 기사를 쓴다. 단어 하나, 조사 하나까지 꼼꼼히 살피며 대표이사의 의중을 읽는다. ‘혁신’이 몇 번 등장했느니, ‘글로벌’이 몇 번 등장했는지를 두고 각종 해석기사도 쏟아낸다. 정작 그 말을 내뱉은 이는 그저 읽기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가끔은 화자 본인도 문장의 뜻을 모른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쓸데없는 확대해석이고, 영웅 만들기다. ‘한국경제를 만든 이 한마디’(전경련의 CEO 어록집)니,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나요’(박근혜 대통령 어록집) 같은 책들이 불편한 이유다.
중기이코노미에 2016년 5월 3일 자로 보도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