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의 문제가 아니다.
“밖에 나가서 화장실 가지마라. 정 급하면 꼭 사람 많은 건물 화장실 가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어깨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발생한 여성 살인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부모 마음이라는 게 그런가 보다. 장성한 딸이라도 공중화장실에 갔다가 괴한에게 살해를 당할까 걱정이다.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 외국인들은 한국의 치안이 좋다고들 하지만 기준이란 건 늘 상대적이다. 공중화장실에 몰래카메라가 있지는 않을까, 성폭행을 당하지는 않을까, 이제는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여성이 남성에게 살해를 당하는 게 새로운 일은 아니다. 토막살인처럼 더 끔찍한 사건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처럼 피해자를 위한 촛불집회까지 열린 것은 처음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살아남은’ 여성들의 포스트잇 편지와 추모의 꽃이 놓이고 있다. 19일에는 촛불집회도 열렸다. 여성들이 분노한 건 가해자가 남긴 한마디 말 때문이다. 왜 죽였느냐 물으니 평소 여성에게 무시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여성이라 죽였다는 것이다. 경찰에서는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 정신분열 때문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이제는 가해자가 왜 살인을 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졌다.
불안에 떨어온 여성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성부나 여성단체가 조직한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온 여성들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조심을 강요하지 말라고, 여성을 죽이지 말라고 외친다. 이번 사건에서도 봤듯 살인사건은 조심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러 나왔다가 잠시 화장실에 갔는데도 죽을 수 있다. 대체 얼마나 더 조심을 해야 한단 말인가. 살인사건이 일어난 뒤 살아남은 여성들에게 ‘조심하라’는 말은 범죄의 책임을 일정부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일이다. 물론 걱정돼서 하는 말임을 알지만, 그런 걱정의 말은 사실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지도 않는다.
살인사건의 잘못은 살인자에 있다. 밤늦게 돌아다닌 여성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식의 발언은 틀렸다. 성폭행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어 성폭행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성폭행을 당했을 때 여성의 옷매무새는 종종 입방아에 오른다. 행여 노출이 심하기라도 했다면 ‘그럴 만 했다’는 식의 발언이 용인된다.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여성들의 움직임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대한 분노다. 이번 일로 살인사건이 줄어들 것이라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여성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뀌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중기이코노미에 2016년 5월 20일 자로 보도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