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 스물여섯, 스물아홉, 그리고 서른.
며칠 전 병원에 갔다. 의사선생님이 내게 "스물여덟살이시네요" 했다. 아, 내가 만으론 이십대구나. 늘 서른살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었다. 한국 나이론 서른살이니까. 나이 앞자리가 바뀌면 천지가 개벽할 줄 알았다.
스물세살 겨울이었다. 은행에서 청원경찰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지점에는 스물아홉 언니들이 많았다. 서른살 짜리 남직원은 언니들을 놀려댔다. 이제 계란 한판이라고. 언니들이 조금 안돼 보였다. 이 언니들의 좋은 시절은 다 간 건가. 나는 어려서 다행이야. 모두들 나를 어리다는 이유로 예뻐했다. 서른이 넘은 언니들은 나를 볼 때마다 부럽다고 했다. 그 언니들을 조심스레 동정했다. 젊음은 내 공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지만 나는 우쭐했다.
청원경찰은 서 있는 게 고역이다. 손님이 없을 때 가만히 서서 딴생각을 하는 것도 능력이다. 그때 난 인생 계획을 세웠다. 스물일곱살 봄에 결혼을 할 거야. 그쯤이면 적당하겠지. 신혼은 2년쯤 즐겨야 할 거야. 애 낳으면 못 놀잖아. 스물아홉 초반에 임신하면 서른 되기 전엔 첫아이를 낳을 수 있겠지? 괜찮은 인생 계획인 것 같아.
스물여섯살 가을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스물아홉살 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며 물었다. 언니, 이제 서른살 되는데 괜찮아? 기분이 어때? 멍청한 질문인데 당시엔 나름대로 심각했고, 궁금했다. 서른살을 앞둔 여자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하고. 내게도 곧 닥칠 일이니까. 그 언니는 담담하게 괜찮다고 했다.
스물아홉 가을이었다. 회사를 그만뒀다. 내 발로 회사를 나온 건 처음이었다. 변화가 필요하다 느꼈다. 이십대의 대부분을 '기자'라는 이름을 달고 살았다. 대학교 학보사에서 3년, 졸업 후 현업에서 4년. 기자 말고 다른 게 하고 싶었다. 떠돌이처럼 돌아다니는 것도 싫고, 업계에 몸담고 있다지만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운명도 싫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일이 싫었던 건 아니다. 나이 앞자리가 바뀌니 무언가 변화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 컸다.
그렇게 두 달 간을 방황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영어학원에 가고, 수업이 끝나면 학원 근처 버거킹이나 스타벅스에서 아침을 먹으며 영어공부를 했다. 뭐 딱히 영어시험 같은걸 준비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좋아서 했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했다. 오전에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집에 돌아와 자기소개서를 썼다. 애매했다. 신입으로 기업에 들어가기엔 나이가 많은데다 내세울 스펙도 없었다. 경력으로 기업에 들어가려면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홍보 일인데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온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에 지원서를 내고, 떨어졌다.
밤에는 악몽을 꿨다. 누군가 날 죽이려 했다. 땀에 흠뻑 젖어 잠에서 깼다. 어떤 날엔 슬픈 꿈을 꿔 눈물로 베갯잇이 가득 젖어있기도 했다. 몇 년간 내 인생에 없던 가위도 다시 나를 찾아왔다. 가위에 눌릴까 봐 잠자기가 무서웠다. 나쁜 기운이 흐르나 싶어 다른 곳에서도 자 보고, 머리를 두는 방향을 바꿔보기도 했다. 잘 이해가 안 됐다. 낮에 정신이 온전할 때의 나는 그다지 괴롭지 않았다. 인생에서 이런 경험도 필요하겠다 싶었다. 첫 직장은 정리해고로 등 떠밀려 나왔지만 두 번째 직장은 내 발로 걸어나왔다. 내 인생을, 내 힘으로 바꿔보려고 한 일이다. 그러나 내 몸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른을 맞았다. 1월의 첫 월요일에 옛 직장으로 돌아갔다.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 막상 돌아가니 편안해졌다. 상황 자체가 나아진 것도 있다. 급여와 직책이 올랐고, 일은 손에 익었다. 여전히 아침에는 영어학원에 다니고 낮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저녁엔 친구들을 만나거나 운동을 했다. 가장 좋은 건 더 이상 서른살이 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이미 됐으니까. 천지가 개벽하지 않았고, 내 몸에는 별다른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싫었던 어려 보인다는 말이 기분 좋은 말로 들린다는 것 정도다. 입에 발린 말인 걸 알아도 말이다.
엄만 서른살에 우리 오빠를 초등학교에 보냈다. 나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을 거다. 난 결혼도 아직, 임신도 아직, 출산도 아직이다. 스물일곱에 결혼해 스물아홉에 아이를 낳겠다는 계획은 잊은지 오래다. 초중고 동창인 절친 중 한 명은 아이를 낳고 일을 하는 워킹맘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친구다. 초등학교 때 이 친구 어머니가 막둥이 임신한 걸 봤더랬다. 그 막둥이는 이제 대학에 들어갔다. 다른 절친 한 명은 2주 뒤 출산을 앞두고 있다. 그 좋아하는 맥주도 못 마시고, 살도 찌고, 배가 너무 나와 제 발이 안 보일 정도라지만 부러울 때가 있다. 미리 숙제를 끝내 놓은 친구를 보는 기분이다. 나도 언젠가는 해야 할 숙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