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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고래 Sep 14. 2020

우연히 찾아온, 삼겹살과 돼지고기 김치찜


돼지고기는,

처음부터 나와 가깝지 않았다.


입맛은 가까운 사람을 닮는다.


한 살 차이로 함께 컸던 언니는 지금도 채식주의자(vegetarian)의 삶을 산다.

어려서부터 고기를 먹지 않던 언니의 입맛에

내 입맛도 어느새 길들여졌다.


요즘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숨 쉬고

함께 먹고 마시는 남편은, 고기를 정말 좋아한다.

특히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나는 종종 레시피를 고민한다.


타협점이랄까.


기름기 없는 퍽퍽한 살코기가 조금 더 편한 나의 입맛을 고려해,

돼지고기 앞다리살이나 목살, 닭가슴살, 소고기 등심 등...

비교적 기름기가 적은 부위를 택한다.




어색하고 낯선 대상과 가까워지려면 특별히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관계.

오늘날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원인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그 해결의 열쇠 또한 관계 맺음에 있다.


안 보면 그만이라고 끊어낼 수 없는 관계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꼰대 상사와 사이코 동료,

어쩌다 가끔 만나면서도 가족이란 이름으로 어색하게 좁혀진 시댁 식구, 또는 처갓댁 식구.

우리들은 그 밖에도 갈등으로 빚어진 숱한 관계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일단, 관계의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면

우리 마음은 그것을 부인하거나 덮으려는 방어기제 꼼수를 쓴다.

그러한 약삭빠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이 먼저 재빠르게 관계의 변화를 눈치채곤 한다.


심한 경우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몸에 체끼가 오르내리고 소화 불량으로 고생하기 일쑤다.

그래서 관계 문제는 음식하고 아주 밀접한 연관이 생긴다.


음식과의 거리 조절은 사람과의 관계와도 비슷하게 닮아 있다.

어떤 음식이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그만이고 담을 쌓고 살아도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우리 몸을 더 병들게 하고, 지치게 하고, 아프게 만든다.


때로는 관계에서도,

끊어내기, 담쌓기, 외면하기가 가장 좋은 해결 방안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편한 상대와 가까워지는 특별한 레시피


recipe #1. 매력의 재발견 (로즈 와인을 곁들인 삼겹살)


대학시절 가까운 선배의 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 간 적이 있다.

그날 저녁, 며칠 전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선배의 부모님께서

프랑스에서 사 왔다는 로즈 와인을 꺼내셨다.

   

차려진 식탁 위에는 가마솥 뚜껑처럼 생긴 냄비가 달궈져 있는데

옆에 놓인 그릇에는 삼겹살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삼겹살을 인식한 순간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못 먹을 텐데 어쩌지......’

걱정이 앞섰다.


난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고

선배 부모님은 웃으며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조금씩

마음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예쁜 와인병 탓인지,

와인의 장밋빛 향기 탓인지,

삼겹살의 핑크빛이 아름다워 보였다.


고기의 굵기가 두툼하거나 하얀 비게 부위가 눈에 많이 띄면,

속에서부터 거부 반응이 생기던 나였다.

그런데 내가 본 삼겹살은 아주 얇았고, 더욱이 고기의 붉은 선홍빛이 영롱했다.  


나의 심리 변화가 스스로도 놀라워

몇 번씩 눈을 감았다 뜨며 삼겹살을 쳐다보았다.

그날의 식탁은, 삼겹살의 매력을 처음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림 by 공감고래


recipe #2. 추억 만들기 (돼지고기 김치찜)


대학시절 가깝게 지내던 교수님 댁에 초대를 받아 방문한 적이 있다.

교수님은 은퇴가 가까운, 머리카락이 온통 은빛이던 할머니였는데,

파주에서 혼자 살고 계셨다.


교수님은 매일 영어로 쓰인 원서를 읽고 계셨는데

그런 분이 과연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지 난 의아했다.

댁에 도착한 후, 곧바로 궁금증은 풀렸다.


교수님 댁엔 두 분이 더 계셨다.

한 분은 집의 관리를 도와주시는 할아버지였고,

또 한 분은 집에서 요리를 해주시는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차려준 식탁에서

난 처음으로 돼지고기 김치찜이란 요리를 만나게 되었다.


식탁엔 큰 뚝배기 하나와 마른 나물 반찬 하나가 조촐하게 놓여있었다.

냄새로 김치찌개가 담긴 줄로 생각했던 나는, 그것이 돼지고기 요리인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묵은 배춧잎이 저마다 도톰하게 썰린 고기를 김밥처럼 돌돌 말고 있었는데,

큰 뚝배기 안에는 그것들이 푸짐하게 담겨 있었다.


최대한 티를 안 내려는데,

내 눈은 절박하게 나물 반찬으로만 향했다.

차려준 분의 애씀과 정성이 담겨 있던 뚝배기가 계속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먹었다가 비위에 안 맞으면 어쩌나, 더 큰 실례를 범하게 되면 어쩌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요리한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결론이 이르자,

용기 내어 뚝배기를 향해 젓가락을 뻗었다.


‘아......’

김치찜 한 롤을 입에 넣은 나는

재빠르게 씹어 삼키려던 것을 멈추고 조금씩 느리게 씹었다.


왜냐하면,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 몸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딩동댕~”

“바로 이거야, 지금 네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이 음식에 가득해!”


부드럽게 씹히는 고기와 묵은지의 깔끔함에 속이 편안했다.

처음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기까지 경직되었던 마음이 풀리고,

긴장되었던 어깨도 느슨해졌다.


두툼한 고기의 두께감도 묵은지의 짠맛을 생각할 때 오히려 적당했다.   

묵은지의 시큼함도 고기의 담백함과 달콤한 양념으로 곧바로 가리어졌다.

잘 익은 묵은지 덕분인지, 고기 본연의 맛인지, 그 둘의 풍미가 일품이었다.  


돼지고기 김치찜을 맛있게 다 먹은 뒤,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난 설거지에 나섰다.

손님에게 어찌 그러냐는 할머니의 손사래가 몇 번 이어졌지만,

이윽고 묵직한 뚝배기를 닦으며, 내 몸이 더 건강해진 그날의 맛을 깊은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사실,

우연한 기회가 아니고서야

불편한 대상에게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대상과 좋은 추억을 만들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다만,

대상과의 어색함을 조금이나마 해결하고자 하는 동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대상에 대한,

새로운 긍정적인 경험은,

그것과 연결된 과거의 혐오, 불쾌, 트라우마 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순하지 않다.


딱 잘라서,

좋은 것(사람, 음식, 관계 등)

vs. 나쁜 것(사람, 음식, 관계 등)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취향과 기호라는 스스로 만든 틀에 갇혀서

겹겹이 쌓인 존재의 여러 층(layer)을 입체적으로 보지 못한다.


새로운 각도에서 대상을 알아가다 보면,

내가 알아왔던 사실 또는 지식이 변할 수 있고, 몰랐던 정보가 더해질 수도 있다.

때로는 그 변화가 두려워 머뭇거릴 때도 많다.


어쩌면 우리에게 불편한 대상 그 자체보다 더 불편한 건,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익숙한 대로, 사람도, 음식도 편식하며 살아간다.


내 취향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를 자유롭게 하고 편안하게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다양한 맛’, ‘놀라운 맛’, ‘더 건강한 맛’을 가리기도 한다.


우리의 삶이 더 깊은 맛을 내기 위하여......

어쩌면 인생에는 뜻하지 않은 ‘우연’이 더 많아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고기는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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