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먹은 음식을 기억한다는 건, 삶의 순간을 공유한다는 걸 의미한다.
얼마 전,
곧 이사 가게 될 집을 보겠다고 언니와 함께 삼송 근처로 마실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릴 때... 이모네 놀러 갈 때... 녹번역 앞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그 하얀 만두 기억나?”
“응 맞아. 엄청 큰 번철에다 하얗게 구워서 먹었던 납작 만두 맞지?”
“맞아 맞아. 우와... 너도 그걸 기억하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녹번역을 지나가며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에게 유일한 여동생이었던 이모는 은평구 신사오거리 부근에 살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 자매를 데리고 종종 이모네 집에 놀러 가곤 했다.
“엄마, 아직 멀었어?”
“응, 한참 남았어.”
두 눈을 꼭 감고, 잠이 든 것처럼 보이는 엄마의 대답이 나는 미심쩍었다.
몇 정거장을 간신히 참고 기다렸던 나는 또다시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녹번역 아직 안 지났어?”
엄마는 계속 보채는 내가 귀찮았는지, 가방에서 조그만 전철 노선표를 꺼내어 내 손에 들려주었다.
“자 봐, 우리가 지금... 그래 여기 있어. 그러니까... 하나, 둘, 셋, 넷...
아직 열두 정거장 더 가야 되니깐, 지금부터 세고 있어.”
엄마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엄마 왼편에 앉아 있던 언니도 엄마에게 기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안내 방송에 따라 노선표의 정거장을 짚어 가며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도 가만히 앉아 목적지에 도착하길 기다리는 건, 일곱 살의 나에겐 무척 지루하고 힘든 일이었다.
길고 긴 지하철 여행을 마치고 역 밖으로 나왔을 때,
깊이 들여 마시는 신선한 공기는 피곤함을 조금 달래주었다.
그러나 녹번역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버스로 갈아타고 얼마큼 더 가야 했다.
‘아직 끝이 아니라고...?’
그 순간 배가 고파졌다.
“엄마, 배고파.”
내가 참지 못하고 말하자, 언니도 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엄마는 그런 우리에게 따라오라는 손짓만 하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울상이 된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보며 걸었다.
“이거 먹을래?”
갑작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엄마가 역 근처에 있는 조그만 포장마차 앞에서 말을 걸었다.
납작 만두 4개 천 원이라는 푯말 하나가 포장마차 지붕에 매달려 흔들거렸다.
대답할 것도 없이 내 표정은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그 포장마차에는 전체 공간을 채울 만큼 넓고 네모난 팬 하나가 놓여있었다.
큰 프라이팬(나중에 그것이 ‘번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위에선,
반달 모양의 큼지막한 납작 만두가 뽀얗고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언니와 나는 호호 불어가며 잡채와 야채로 속이 꽉 찬 만두를 크게 베어 물었다.
먹을수록 줄어드는 만두를 보며 서글픈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만두로 입술에 기름칠한 나는,
다시 힘을 내어 무사히 버스를 갈아탈 수 있었다.
그날부터 녹번역 앞 납작 만두는 이모네를 갈 때마다 들리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그날의 납작 만두는 희망의 신호였다.
끝을 알 수 없는 내면의 불안과 싸우고,
육체의 한계와 씨름하면서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분명한 자기 암시, 희망의 메시지.
살아가면서 가끔 마주하는 희망이 지친 삶에 새로운 동력이 되는 때가 있다.
누군가의 명언처럼, 위기 속에 발견하는 기회가 그런 것일까.
삼송에서 돌아오던 날,
언니도 그날의 납작 만두가 그리운 듯 혼잣말처럼 말했다.
‘정말 맛있었는데...’
마흔이 넘어서도 어릴 적 그 만두의 맛을 잊지 못한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살면서 지치는 순간이 있다.
인생에서 이러한 우울함은 부메랑처럼 반복되어 돌아온다.
그럴 때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소울 푸드 레시피’에서 납작 만두를 꺼내 굽기 시작한다.
지친 나를 위로하며...
다시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