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먹은 국수의 길이는 몇 미터나 될까?
열 살 무렵.
기차역 플랫폼에서 먹던 가락국수,
김가루가 소복이 내려앉은 그 가락국수를 팔던 곳까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춘천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
기차를 타는 설렘으로 발걸음은 신나고 가벼웠다.
어린아이였던 나에게는 아빠와 엄마면 충분하던 시절이었다.
집을 떠난 여정의 피로감도, 얼굴을 긁고 지나가는 차가운 겨울바람도 내게 큰 고통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달라져도 여전히 아이들의 마음은 똑같지 않을까.
아이들의 양식은 돌봄에 대한 신뢰가 아닐까.
내가 면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도,
어쩌면 돌봄에 대한 무의식의 갈망이 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면.
계속 이어질 것 같은 길고 긴 모양,
입술에 닿는 면발의 부드러운 감촉,
빈 속을 편안하게 채워주는 든든함,
마치 어린아이의 애착 이불 또는 애착 인형처럼
면 요리는 보이지 않는 갈망을 채우는 나의 애착 음식이 돼주었던 것 같다.
10살, 겨울. 청량리역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우리가 떠나온 작은 시골역의 풍경과는 사뭇 달라 어색했다.
우리 가족이 기차에 올랐던 상천역은 한적하다 못해 외로워 보였다.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며, 아빠와 언니와 나는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 역을 떠나올 때, 그곳이 더 이상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가 만든 세 명의 눈사람과 작별 인사를 했다.
청량리역.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눈사람처럼 서 있던 나를, 아빠가 손으로 잡아끌었다.
인파를 헤치며 서두르는 아빠의 걸음을 쫓느라 열심히 뛰었다.
마침내 아빠의 걸음이 멈춘 곳은, 기차역 플랫폼의 한가운데였다.
그곳엔 철로 만든 네모난 부스가 놓여 있었는데,
먼저 도착해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곳에 둘러 서 있었다.
가락국수를 파는 가게였다.
기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는데, 기차역 중앙에서 가락국수를 먹는다니......
마치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스의 구조는 독특했다.
사방으로 유리창이 달려 있고, 그 창문 바깥으로 이어진 좁은 난간이 테이블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부스 한 면에 서서, 주문한 가락국수가 나오길 기다렸다.
테이블에 간신히 얼굴이 올라오는 나는,
발 뒤꿈치를 살짝 들면 부지런히 가락국수를 만들고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와!’
요리 과정을 지켜보던 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가락국수가 만들어지는 시간,
1분이면 충분했다.
기차역 가락국수가 나에겐 첫 패스트푸드였다!
아주머니는 가락국수 면을 깊숙한 채에 담아 끓고 있는 물통에 넣었다.
그 통은 면이 담긴 여러 개의 채를 동시에 꽂을 수 있어 꽤 신기했다.
몇 초가 흐른 뒤, 아주머니는 면이 든 채를 꺼내 탈탈 털어 물기를 빼냈다.
그것을 그릇으로 옮겨 담고, 큰 국자로 육수를 한가득 부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유부와 김가루 고명을 올린 뒤,
손님 앞으로 뻗어 있는 난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와!’
드디어 국수면을 입안 가득 넣었을 때
나도 모르게 두 번째 감탄이 새어 나왔다.
‘맛있다!’
김과 유부가 이루어내는 절묘한 조화가
씹을수록 입 안에서 정확한 간을 맞추어 가며 맛을 내었다.
기차역의 모든 풍경이,
부스로 된 가락국수 가게의 낯섦과,
그릇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
국수를 먹으며 손님들이 내뿜는 또 다른 연기와
바쁘게 스쳐가는 사람들의 소란한 소리,
상천역에서 이별한 눈사람과
조화로운 가락국수의 맛까지,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가락국수를 먹으며...
그제야 눈사람을 만들 때 얼어붙었던 뱃속이
다시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뱃속에서
누군가 내가 먹고 있는 면들을 뜨개실처럼 이어 붙여가며
길고 긴 목도리를 짜고 있는 것 같았다.
눈사람 요정이었을까?
국수면으로 짜인 하얀 목도리를 두른 나는
포근한 포만감이 온몸으로 퍼져가는 것을 느끼며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겨울이 오면,
가락국수를 먹을 때면,
그날의 기차역 풍경이 떠오른다.
부모님만으로 충분했던 그 시절,
면실로 짠 목도리로 나를 감싸 안아 준
동화 속 꿈의 맛, 그 가락국수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