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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고래 Oct 29. 2020

자신의 뿌리를 부르는 맛, 부대찌개

‘백 년 만에 내리는 어마어마한 폭설...’이라고 기사가 떴다.

나는 처음 도착한 곳이었지만, 현지 사람들은 백 년이라는 수식어를 달아놓았다.

믿기지 않는 그 자리, 독일의 한적한 시골에, 나와 언니는 여행 중이었다.


예상치 못한 폭설로 여행 일정과 목적지를 대폭 수정해야만 했다.

독일 남부에 살고 계신 외삼촌에게 다급히 연락을 취한 후,

우리는 외삼촌이 살고 있는 아우크스부르크행 급행 기차에 올랐다.


눈길에서 언니와 나는 큰 트렁크를 하나씩 끌고 가느라 몹시 지쳐있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정 패딩 사이로 하얀 얼굴만 빼꼼 나와있는 모습이 마치 눈밭을 구르는 김밥처럼 보였다.

허기짐 속에 김밥 생각이 절로 났다. 집밥이 그리웠다.




아우크스부르크 역에 기차가 정착했고,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서 있는 외삼촌을 만났다.

거의... 30년 만이었다.


어릴 적 외삼촌은 우리와 자주 놀아주었다.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잠을 잘 때면 언니와 나에게 재밌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었다.


순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줄 알아?

아~니!

돼지고기 내장을.... (자세한 설명)

으아아악! 삼촌, 나 이제 더 이상 순대는 안 먹을 거야. (눈물)


외삼촌은 이따금 영문법도 가르쳐주었는데,

외삼촌에게서 배운 영어 수동태 문법은 아직도 까먹지 않았다.


외삼촌과 연락이 잘 닿지 않은 채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엄마로부터 외삼촌의 이민 소식을 들은 건 삼 년 전이었다.


독일의 한적한 시골역,

100년 만에 내린 폭설 속에서 외삼촌의 얼굴을 마주한 건 유럽의 풍경만큼이나 이국적이었다.


외삼촌의 겉모습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모습과 사뭇 달라져있었다.

하지만 선글라스에 언뜻 비친 눈빛과 또렷한 목소리만큼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똑같았다.


눈길에 힘들었지?

가자... 외숙모가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놨어!




유럽의 차(tea)가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여행을 하는 동안 한국의 뜨거운 국물 요리가 계속 떠올랐다.


가마솥에서 펄펄 우려낸 뜨끈한 사골 국물이 그리웠고

묵은지 넣고 얼큰하게 끓인 김치찌개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겉모습뿐 아니라, 뱃속 무늬까지 한국인인 모양이다.


외삼촌의 집에 들어서자 외숙모와 사촌이 우리를 반겼다.

뒤 이어 얼큰한 고춧가루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방에 짐을 풀자마자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메인 메뉴는 부대찌개였다!

독일에서 김치를 만난 것도 반가운데, 부대찌개라니...!

냄새만 맡았는데도 불편했던 속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부대찌개는 음식의 기원 자체로 볼 때 퓨전 요리에 해당하지만,

독일에서 먹는 부대찌개는 왠지 더 그렇게 느껴졌다.

독일을 대표하는 햄과 한국을 대표하는 김치가 만난 요리였기 때문이다!


독일의 햄은 한국의 것보다 더 짭짜름했고 허브향이 강했다.

햄의 맛과 향이 한국에서 먹은 것과 달라서인지, 찌개의 맛도 지금껏 먹어온 것과는 조금 달랐다.

음식의 맛도 새로운 공간과 환경 속에서 다르게 적응하는 모양이었다.


비록 색다른 부대찌개의 맛이었지만, 고향의 맛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유럽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부터 속에서 느끼함이 올라오던 터였다.

칼칼함과 매운맛으로 오랜만에 속이 뻥 뚫리는 개운한 식사를 뚝딱 해치웠다.

 

칼칼함과 매운맛,
뇌에 각인된 이것이야말로 한국인의 소울 푸드였다.


부대찌개뿐 아니라,

반찬으로 함께 먹은 김치와 계란말이, 나물 무침도 모두 그리운 집밥의 그 맛이었다.

나는 저녁을 먹는 내내 외숙모의 요리 솜씨와 한국의 음식에 대해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외숙모는 처음 독일에 왔을 때 얼마나 어렵게 배추를 구했는지에 관해 설명했다.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마치 영웅의 무용담처럼 들렸다.    

가끔은 김치 없이 밥을 못 먹는 자신들의 지독한 입맛을 탓하기도 했다.


그들은 큰 꿈을 그리며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이민을 결심했다.

유럽 이민 생활에서 여러 가지 시련을 겪었다.

그중에서 그들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생소한 외국어나 경제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가장 강렬하게 귀향 생각으로 흔들렸던 순간은,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이었다.  



소울 푸드는 한 사람의 뿌리다.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필요한 끼니를 가리키는 단어다.

그러나 소울 푸드는, 끊임없이 찾게 되는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마치 태어나고 자라온 삶의 토양 같아서,

소울 푸드를 통해 마음과 영혼까지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끝내 흔들리고 마는 것이다.


머나먼 이국땅까지 삶의 영토를 옮긴 외삼촌과 외숙모는,

언어와 취업의 현실적 장벽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강인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남모를 속사정이 있던 것이다.


소울 푸드를 먹어야 웰빙(well-being)한다.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느끼며 마음까지 건강하기 위해,

우리에겐 소울 푸드가 필요하다.


가끔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스스로가 낯선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설움 속에서도 참고 견뎌야 하는 순간이 있다.  

뿌리째 흔들리는 모진 바람에 맞서고 있을 때,


햄의 육즙이 가득한 부대찌개를 추천한다.

칼칼하면서도 부드럽게 속을 풀어주는 김치와 햄의 어우러짐은,

출신이 전혀 다른, 낯선 두 가지 재료가 만나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내는 까닭이다.


낯선 땅, 이방인, 서로의 문화가 달라도,

우리의 존재와 가치는 그 자체로 빛나고 아름답다.

새로운 만남이 그 이전 세상에는 없었던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까닭이다.


깊어지는 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우리들의 이야기는 소울 푸드와 함께 밤새 두서없이 펼쳐졌다.

백 년 만에 내리는 눈도 귀 기울이며 창가에 소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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