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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고래 Nov 25. 2020

도가니빵을 아시나요?

유심 카드 인터넷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눈보라 섞인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와 마음은 더 다급해졌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핸드폰 앱으로 맛집을 검색했다.


베토벤이 청각을 잃고 방황했다던 비엔나의 케른트너 거리

나 역시 두 볼의 감각을 잃어버린 채 그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어디로든지 들어만 가고 싶었다.


아주 잠시 인터넷이 빨라졌다.

간절한 나의 소원이 순간 눈보라보다 강했던 모양이다. 


근처에 별 4.0 이상의 평가를 받은 식당 하나가 폰 화면 위로 떠올랐다.

망설임 없이 빨간 화살표를 따라 우측으로 난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둘러 걸었다. 우리는 금세 목적지 앞에 도착해있었다.

 

화면 속 아이보리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어둑해진 오후 탓인지 눈보라 때문인지, 눈앞에 보이는 건물은 사진과 다르게 회보라빛으로 보였다.

언니와 나는 식당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한 뒤, 좁고 길쭉한 문의 금빛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밀었다.

 

문과 벽을 경계로 분리된 안과 밖, 

불과 한두 걸음 차이밖에 나지 않는 장소였지만 두 공간의 계절은 서로 너무 달랐다. 


우리는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전통 음식을 전문으로 요리하는 레스토랑이었다. 

메뉴판을 펼치고 나서야...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현실이 조금씩 인지되기 시작했다. 


서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화이트 셔츠에 검정 또는 하얀 브이넥 조끼를 입고, 한쪽 팔에는 흰 수건을 걸치고 있었다.

언젠가 영화나 동화 속에서 본듯한 장면이었다.


겨울바람을 피해서 들어온 다소 낯선 공간은, 

여행객의 발길이 드문,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다른 테이블에 있는 손님들에게도 눈길이 갔다. 

모두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겉보기에 비즈니스의 연장선쯤으로 보이는 식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들도 우리의 등장이 낯설었는지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봤다. 


가격은 보지 않기로 했지만,

메뉴판 위를 샅샅이 훑는 우리의 눈빛은 칼바람처럼 날카로웠다.


결국 선택한 음식은 비엔나의 전통 음식, 

타펠슈피츠(Tafelspitz)였다. 


넓고 깊이가 있는 둥근 그릇에 육수로 절반 가량을 채우고, 

삶은 소고기와 찐 감자 등의 채소가 함께 담겨 나왔다.


유럽 여행 중 처음 보는 '국물 요리'였다. 

국의 종류가 다양한 한국 음식과 비교하자면 사실 새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유럽이었다. 

아무리 추워도 따뜻한 차, 꿀 외에 몸을 따뜻하게 할 재료가 없어 보이는 가엾은 나라였다.


대부분 짜거나 차가운 유럽의 음식이 딱하게 여겨졌던 나에게는, 

갈비탕을 연상하게 만드는 타펠슈피츠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서빙을 하던 할아버지가 그런 나의 생각을 눈치챈 듯했다. 


그가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다.

허리를 숙여 독일어로 무언가 말하더니 

우리에게 직접 먹는 방법을 시연했다.


그는 먼저 국물을 떠서, 우리 앞에 놓인 하얀 수프 그릇에 각각 나누어 담아주었다.

그러자 국물 속에 잠겨있던 도톰한 스테이크 크기의 소고기가 보였다.

그리고 어느 부위인지 잘 모르는 큰 뼈 한 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덧 오스트리아 할아버지의 안내를 따라, 나는 빵 한쪽을 손 위에 올렸다.  

그는 나이프로 소고기 뼈 속에 있던 뭉근 젤리 같은 부위를 꺼내더니

내가 들고 있는 빵 위에 그것을 쓱 펴 바르는 것이었다.


Oh Mein Gott-!  (오 마인 고트-!)

이번엔 또 다른 충격이었다.


갈비탕 국물에 밥을 말아먹던 나에게

도가니 같은 부위를 빵에 발라 먹는 행위는...

말 그대로 '문화충격'이었다. 


몇 십분 전 추위와의 싸움도, 

잘 터지지 않던 인터넷으로 인한 답답함도,

도가니빵? 소고기젤리빵?이 만든 충격에 비교할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자,

할아버지가 얼른 맛을 보라는 제스처로 우리를 재촉했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도가니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갈비탕맛 버터를 따뜻하게 녹여 바른 것 같은 맛이 났다.

빵을 씹고 있지만, 고기의 풍미가 느끼하게 퍼졌다.

깍두기와 배추김치 생각이 절로 났다. 


평소 고기를 즐기지 않던 나의 식성을 고려하면,

이 정도의 맛이라면 그래도 성공적인 요리를 선택한 것이라고 스스로 만족했다. 


나는 도가니빵을 한 입 더 먹었다.

천천히 씹을수록 호밀의 구수한 맛과 

소고기 젤리 부위의 느끼하면서도 부드러운 고기 향이 썩 잘 어울렸다. 


허리를 숙이고 친절하게 가르쳐 준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나는 씽끗 웃었다.

무표정했던 그는 처음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서 당당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뼛속의 젤리를 떠서 호밀빵 위에 엷게 펴 바르는 동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스트리아 할아버지의 국물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도가니빵 먹는 법을 진지한 표정으로 가르쳐주던 할아버지의 소명 의식이, 고풍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정장을 입고 식사를 하던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깍두기를 그리워하며 먹고 있던 내 배속을 왠지 모르게 계속 간지럽히는 것이었다.  


음식을 다 먹은 후 비싼 값을 치렀지만

새롭고 낯선 문화를 경험한 것에 대한 나름의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친절한 서빙에 대한 감사 또한 잊지 않았다.


문 밖을 나오니 모질게 내리던 눈보라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우연히 맛본 갈비탕과 도가니빵으로 든든히 위를 채운 덕분인지 

감각마저 잃게 했던 추위가 조금은 견딜만했다.


어쩌면...

오스트리아 할아버지의 소울푸드를 맛본 까닭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소울푸드가 있다.

그것은 그 누군가에게 때로는 자부심이고, 진지한 소명 같은 것이기도 하다.


언젠가 또다시 케른트너 거리를 가게 된다면, 다시 한번 그곳에 들리고 싶다.

비엔나의 전통 음식 타펠슈피츠, 

그리고 누군가의 소울푸드 도가니빵을... 당신에게도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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