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우 정답은 정말 답답하고 지루하다. 난민 이슈가 그런 것 같다.
어린 시절 몇 년간을 소록도에서 살았다.
국립한센병원이 있고 한센병 환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당시 공식 명칭은 ‘국립나병원’, ‘나환자’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문둥이’라고 불렀다.
‘아이 피를 마시면 문둥병이 낫는다고 해서, 문둥이가 어린아이를 잡아간다’는 이야기가 여전히 돌던 시절이었다.
병이 진행 중인 이들보다, 다 나은 이들이 더 많았다.
진행 중이라도 약을 복용하고 치료하며 전염성은 사라진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병이 진행 중일 때 손상된 외모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나은 이들까지도 문둥병 환자라고 불렀다.
소록도에서 살았다고 한센인들과 매일 어울려 지냈던 것은 아니다.
섬 안 병사 지대는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됐다.
병원 직원 등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병사 지대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한센인들을 마주치는 일은 가끔 부모님을 따라 병사 지대를 방문했을 때 뿐이었다.
그것도 병이 진행 중이거나 전염성이 있는 상태인 분들은 전혀 만날 수 없었다.
문드러진 손,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 사실 두려웠다.
옮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가가기 어려웠다.
내가 어려서, 약해서 더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어머니는 한센인들을 만나면, 문드러진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셨다.
사실 그래도 아무 상관이 없는데, 참 떠올리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한 번은, 병사 지대 한센인들에게 간식을 나눠주는 일에 어린 내가 투입됐다.
두 손으로 어린이가 주는 빵과 우유를 받아 든 한 중년 한센인 여성이 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축복받으세요.’
그 순간, 머리가 띵해지면서 맑아지던 느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들도 축복을 줄 수 있구나. 내게 뭔가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구나.
당연한 일인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나도 자라면서 몸이 커지고 머리가 굵어졌다.
어느 순간 두려움은 사라졌다.
스스로 약자라고 여기는 이들은, 낯선 이들에게 더 큰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 공포가 헛된 것이라는 합리적 설득은 잘 먹히지 않는다.
소록도 시절의 나를 대입해보면 그렇다.
나의 두려움은 어떻게 사라졌을까.
아무렇게나 한센인들과 손을 잡고 포옹을 하는 어머니를 보면서였을까.
내가 그분들에게 빵을 건네고 그분들에게서 축복을 받으며 소통을 해서였을까.
내가 강자이고 그들이 약자라는 사실을 차차 깨달아서였을까.
분명하지 않다. 복잡하다.
아마 모두가 얽혀 있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있다.
정책은 오직 한 군데 개입했다.
격리였다.
병사 지대에 비한센인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격리하는 것.
치료하고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한센인들을 감금했던 것.
한센인에 대한 공포를 풀려는 정책이 아니었다.
공포를 그 자리에 그대로 묶어두는 정책이었다.
공포가 문제인데, 정책으로 그 문제를 풀려고 하면,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내겐 그때 소록도의 한센인들이, 지금 제주도의 난민들 위에 겹쳐진다.
지금 그들에게 느끼는 공포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먼저 행동하는 사람들을 찾는 일,
빵과 축복을 나누었던 것처럼 교류가 일어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일,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지를 알 수 있도록 교육을 변화시키는 일.
이런 일을 할 때가 아닐까.
논리를 앞세워 사이다처럼 열변을 토해 봐도, 변화는 쉽지 않다.
합리성의 영역에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책이 직접 할 수 있는 일도 마땅치 않다.
2016년 독일 뮌헨을 방문했을 때, 도시는 시리아 난민 문제로 시끄러웠다.
그때 시민극장을 개방하고 매주 월요일 웰컴 카페를 열어 시리아 난민들과 어린이 놀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보드게임을 하며 같이 노는 장을 만든다던 그곳 활동가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 정부가 그런 활동을 적극 밀어줬다.
우리도 시민사회가 나서서 이런 일들을 해내도록, 정부는 조심조심, 조금씩 조금씩 밀어주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떤 경우 정답은 정말 답답하고 지루하다.
난민 이슈가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