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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악치료사 이원지 Oct 18. 2023

아직 끝나지 않은 애도 작업

나의 난민 친구는 올 봄에 사망했다. 

딸이 샤워를 하다가 콧노래를 부른다. 음악시간에 배웠다며. 

'잠보 잠보 브와나, 아바리 가니 므쥬리 사나'. 



나는 이 곡을 재작년에 난민들과 음악치료를 하면서 알게되었다. 케냐 전통곡. 곡을 ON해놓고 악기연주며 춤이며 노래며 난민들과 신나게 두드리고 흔들어대고 노래했다. 딸의 노래로부터 그때의 장면들이 스쳐지나가다 그만 웃음기가 쏘옥 들어가버렸다. 나와 많은 정을 나누었던, 그리고 그때 함께 잠보 브와나를 열심히도 불렀던 그 친구는 반년전 따스한 봄날을 마지막으로 생에선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앙지는 특별했다. 콩고인이었고, 늘 얼굴에 웃음을 띄고 있었다. 난 앙지와 숙대 정문 앞에서 처음 만났다. 난민음악치료로 난민들을 모집하고 있었고, 앙지는 본인이 뮤지션이라며 흥미있는 주제라 왔노라 전했다. 앙지는 키가 꽤나 컸고 몸집은 훨씬 더 컸다. 이쁘게 말해준거지, 앙지는 사실 굉장한 비만이었다. 아참, 앙지는 남자이고 나보다 세살 위였다. 비만의 이유를 들어보니 신부전증을 설명하는듯 했다. 배에는 물이 차올라 빼내는 수술도 했다며 손짓발짓으로 열심히도 알려주었다. 


다시 숙대 정문 앞으로 돌아와서. 앙지는 나와 음악대학원 7층으로 올라가 다양한 악기들을 구경했다. 특별히 아프리카 악기들을 반가워하며 이것저것 만져보고 연주했다. 큰 젬베를 가지고 나와 연주를 하는데, 퍽이나 수준급이어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척도 검사지를 살짝은 귀찮아했지만 구글과 나의 설명에 힘입어 잘 끝내주었다. 그때부터 앙지와는 4계절 내내 음악치료를 진행하며 1주일에 한번씩 꼬박이 얼굴을 보는 사이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내가 기특한건 그 추운날도 난민지원센터에 딸 둘을 데려가며 음악치료 클래스를 진행했다는 것. 아이들은 추운날 저-쪽 다른 방에서 놀거나 먹거나 보면서 엄마를 기다렸다. 내 마음을 아는건지 어쩐건지 앙지는 세션이 끝나면 우리 아이들과 정말 잘 놀아주었다. 아이들은 앙지를 좋아했다. 간단한 게임도 하고 퀴즈도 내어주고, 심지어는 같이 코믹댄스도 추어주었다. 귤도 여러번 받아먹은듯 하다. 앙지는 맏형이었고 콩고에 친동생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세션이 끝난 후의 차갑고 깜깜한 밤에는 좁은 골목, 내 차가 나갈 수 있도록 뒤에서 손짓도 여러번 해주었다. 


앙지는 음악에 꽤나 진지했다. 내가 가져가는 악기는 처음 보는 것이더라도 빠르게 다룰줄 알았다. 그리고 역시 아프리카인 답게 리듬을 어찌나 잘게 잘 쪼개는지, 정말 이건 영상을 찍어놨어야했다. 한번은 음악을 감상한 뒤에 만다라(그림)를 그리는 시간을 가졌는데, 파스넷을 들고 있는 손의 움직임이 너무도 진지하여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음악이든 미술이든 예술에의 접근이라면 모두 진지했던 것 같다. 

감상곡에 맞추어 즉흥연주하는 앙지.



한참 논문 마무리 작업을 하다가 앙지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연락을 했다. 며칠 뒤였나, 앙지 삼촌이라는 분에게 앙지 번호로 연락이 왔다. 내가 놀랄까봐 염려하면서, 앙지가 지난 주에 사망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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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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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콧노래로 잠보브와나를 부르기 전까지도 나는 앙지가 어딘가 살아있었다고 생각한것 같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앙지 장례식이 열렸다. 난민 신분이었기에, 시신을 본국으로 보내는 절차와 과정들이 매우 복잡했는지 콩고 커뮤니티에서 여러모로 회의하고 애를 썼다. 결론은 의정부의 한 병원 안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서 장례예배를 진행한 후에 시신을 본국으로 보내는 것으로. 

따뜻한 봄날, 나는 남편과(만) 의정부의 병원을 찾았다. 앙지삼촌을 매우 좋아하는 우리 딸 둘에게는 이야기하지 못한채로.(물론 지금도 모르고.) 앙지가 한국에서 지내며 여러 루트로 만나게 된 한국인들도 손수건을 들고 장레식장엘 찾아왔다. 앙지의 고국 친구들과 몇의 친척들이 의자에 앉아 울고 훌쩍였다. 앙지는 유머러스하고, 정이 많고, 친절했다. 콩고 커뮤니티 안에서도 단연 중심되는 사람이었을 터. 

오랜만에 그곳에서 만난 난민지원센터 대표님이 말했다. "한국정부가 조금만 더 넉넉해서 앙지를 난민인정시켜주었더라면.. 앙지가 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 

앙지는 나와 못보는 몇달사이 병세가 심각해졌던 모양이다. 비만했던 앙지는 더욱 더 커졌었다고. 병세가 악화되지만, 챙겨먹길 잘하나, 치료비가 있길 하나. 마지막 며칠동안은 혼수상태로 병원에 있었단다. 안타깝고 속상했다.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 평소에 많이 사랑하던 신의 품에 안겼겠지. 


그를 기억 안에서만 만날수 밖에 없기에 슬프다가도 동시에 내 기억 속에 계속 살아주어 고맙다는 생각. 눈을 감으면 떠올려지는 앙지의 얼굴과 모습이 흐려지지 않도록 자주 앙지를 떠올려야지. 하늘에선 아프지 말고 그토록 사랑하는 예술에 푹 빠져 즐겁게 살아가기를! 사랑해 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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