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형과는 안 맞는 여행육아
아이가 만 5살이 넘으면서, 이제 좀 뭔가 공부하는 여행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기획한 여행이, 이번 강릉 여행이었다.
서울에서 심하게 멀지도 않고, 바다도 있고, 유적지까지 있는 곳!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아이가 즐기면서 지식도 얻어갈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각 여행지마다 미션을 준비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준비한 미션, 뚜둥.
첫 번째 미션, 양떼목장에서 양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보기.
이건 나름대로 성공이었다.
그림으로 그리려니, 아이가 더 자세하게 양의 모습을 관찰하게 되었다.
양떼 목장에서 먹이 주기 외에도 양을 관찰한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두 번째 미션은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에서, '홍길동전'에 관한 것을 찾기.
그런데, 생각보다 공원의 규모가 작았다.
기념관에 들어가자마자 홍길동전 책들이 잔뜩 즐비되어 있었는데, 기념관을 나오니 홍길동에 관련된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뭔가 홍길동에 관한 동상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당황스러웠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는 내 미션 따위는 까맣게 잊고 그냥 풀밭에서 해맑게 뛰어다녔다.
세 번째 미션은 오죽헌에서 5천 원짜리에 그려져 있는 오죽헌 그림 찾기.
오죽헌 입구로 들어가면 딱 지폐에 그려진 그대로 있고, "와 지폐랑 똑같아."라는 말을 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어?
집 뒤에 검은 대나무가 있긴 한데, 지폐와 같은 건물의 모습은 아니었다.
써니는 지폐에 코를 박고 열심히 건물을 찾고 있었는데, 내가 슬그머니 지폐를 빼앗고 검은 대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와~써니야 이것 봐. 진짜 대나무가 검다~!!"
다행히 써니는 지폐를 잊고, 같이 감탄해 줬다. (고맙다 여섯 살아..)
내가 미션을 준비하고, 그걸 아이가 답을 찾아내고, 착착 쿵작 맞아가는 그런 그림을 원했건만...
아, 이거 아닌데....
나는 계획을 세우고 그걸 지켜나가는데서 희열을 느끼는 극 J형 인간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계획 따윈 부질없다는 것을 수시로 느낀다.
아이라는 존재 자체가, 상수가 아닌 변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본래 계획대로 지켜지지 않아도 여행은 즐거웠고, 우리는 얻어낸 것이 많았다.
미션을 하기 위해서 사전에 읽었던 홍길동전은(책이 너무 길어서 3일에 나눠서 읽어줬다.) 6살짜리 아이와 신분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줬고, 오죽헌에서 있는 줄도 몰랐던 율곡인성교육관(어린이 박물관)은 유익하면서도 즐거운 볼거리가 가득했다.
또한, 아이는 이번 기회에 '오죽'이 검은 대나무를 뜻하는 한자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고, (애미가 반복 질문함) 양떼목장에서는 햇빛에 늘어져 있던 양몰이 개 보더콜리와, 갈색 얼룩이 있던 고양이를 한참 동안 쪼그려 앉아 구경할 수 있었다.
그것뿐인가, 아이와 손잡고 눈 덮인 양떼 목장을 걸으면서 깔깔거리던 파란 하늘 아래의 시간과, 계획에 없었던 모래놀이를 했던 아침햇살 반짝이던 강문해변, 칼국수 먹고 나서 충동적으로 샀던 강릉샌드의 달콤하고 고소한 살찌는 맛, 더블베드였던 숙소에서 호기롭게 혼자 자겠다던 녀석이 불 끈 지 5분도 안돼서 내 품에 파고들었던 밤시간..
계획은 부질없었지만,
그래도 계획이 있었기에 이런 빛나는 틈새도 있던 것이 아닐까?
숙소에 돈을 더 지불하고 씨뷰를 할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었는데,
전망 좋은 스타벅스에서 씨뷰고 뭐고 초콜릿케이크를 흡입하는 아이를 보자니, 전망 따위를 뭘 고민했나 싶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에, 너와 내가 같이 있다는 것이지. (그리고 초콜릿케이크도..)
이렇게 첫 여행의 계획이 크게 유용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 여행계획을 세울 것이다.
언젠가는 나의 계획대로 여행을 가는 날도 있지 않을까?
뭐 계획대로 안돼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고.
점점 아이를 키우면서 유연해진다.
여행을 가보니, 더 유연해진다.
이러다가 너무 유연해져서 오징어가 되면 어쩌나 싶다.
아이와의 추억을 영상으로도 남기고 있습니다.
즐겁게 감상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