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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교토 그리고 아홉 번째 결혼기념일

20241009 건담으로 시작해서 건담으로 끝난 하루

by 원지윤

올해로 결혼 9주년. 이제 10년 차 부부가 되었다. 9년 전에는 결혼기념일을 해외에서 보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감회가 새롭고 감사했다. (사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마음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감사했을지도.)


오늘은 교토에 있는 건담베이스에 가기로 했다. 서둘러 조식을 먹고 JR오사카역으로 가서 지하철 발권을 했다. 우리나라 지하철역처럼 탑승구가 같고 각각의 지하철 라인을 색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 아니고 같은 오사카역이지만 라인마다 회사가 달라서 개찰구 위치가 다르다고 들었다. 오사카역 지하철은 복잡하기로 소문이 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중간에 잠깐씩 헤매긴 했지만 크게 잘못 들어가지 않고 잘 돌아왔다. 승차권 구매할 때는 터치스크린에 한국어 버전이 있어서 훨씬 수월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모르고 헷갈릴 땐 짧은 일본어와 몸짓으로 물어보기 전략! 마침 옆에 있던 지하철 역무원에게 물었고 역무원의 안내대로 교토행 Special rapid 편을 탔더니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Special rapid 편은 중간중간 역들을 지나친 걸 보면 급행이었다.


조식 먹는 아이 / 교토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바라본 창문 밖 풍경


삼십 분을 달려 교토역에 도착했다. 역에 내리자마자 기모노 입은 여성들을 볼 수 있었는데, 기모노 의상을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에서 네즈코가 입고 나오는 것을 봤지만 실제로는 처음 본 아이가 남편에게 물었다.


"어, 아빠! 기모노다!"

"응. 우리나라 한복 같은 거야."

"저걸 왜 입어?"

"중요한 날 일 수도 있고, 입고 싶을 수도 있지. 이 교토라는 도시는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곳이라 전통을 중요하시는 것 같아. 우리나라 경주 생각하면 될 것 같아. 경주도 천 년이 넘게 신라의 수도였잖아. "

"그렇구나. 기모노 신기하게 생겼어."


교토는 한자로 京都(경도)다. 서울 경 도읍 도. 수도를 의미하는 일반명사라고 한다. 도시 이름 뜻이 수도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교토역


교토역에서 히치죠 거리 쪽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이온몰 교토가 있다. 약 600미터 걸어가다 보면 보인다. 제주에는 건프라가 파는 곳이 별로 없을뿐더러 물건도 많지가 않다. 그나마 제주 시내에 박서방이라는 곳이 있어서 아이와 자주 가곤 하는데 매번 갈 때마다 물건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아이가 늘 아쉬워했다. 이번에 여행을 오사카로 온 이유가 많은 건프라를 보고 구매하기 위해서인 만큼 이날은 더 특별히 건담 베이스에서 마음껏 즐겼으면 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답게 하루에 한 개 일정만 계획했다. 오늘의 일정은 건담 베이스 교토.ㅎㅎ


이온몰 교토 입구 / 건담 베이스


아이는 제주보다 규모 있는 건담 베이스를 보고 즐거워했다. 빌드필드가 있는 것을 보자마자 사서 여기서 만들어서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기로 했다. 뒤에 일정이 없기에 여유롭게 허락할 수 있었다.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여유롭게 계획한 남편 칭찬해.) 빌드필드 이용 시 니퍼를 무료로 빌려준다고 되어 있었지만 집에 있는 니퍼가 거의 수명을 다해가기도 하고 일본 니퍼는 다른가 싶어 이참 저참 니퍼도 함께 구매했다. 아이는 한 시간 가까이 건프라를 만들고, 한 개 더 하고 싶다고 해서 흔쾌히 허락했다. 대부분 매대만 있을 뿐 이렇게 만들거나 직접 해보는 공간이 있는 것은 처음이라 신선하고 좋았다. 우리는 아이가 건프라를 만들고 구경하는 동안 이 공간에서 편하게 머물 수 있었다.


건담 베이스 매장 안 모습


건담 베이스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락실이 있는데, 일본어는 잘 모르지만 감으로 신통방통하게 게임을 해나갔다. 오락실에 건담 게임이 없는 우리나라와 다른 점에 아이가 신나 했고 처음 하는 게임이다 보니 익힐만하면 죽고 익힐만하면 끝나서 더 하고 싶다며 졸랐다. 원래는 졸라도 안된다고 했겠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흔쾌히 즐기도록 허락했다. TMI이지만 스토리를 알고 하는 게임은 예술의 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가 게임하는 것에 거부감은 없다. 다만 모든 것이 그렇듯 정도가 지나치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온몰 오락실


아이가 즐기는 동안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있던 잡화점을 구경했다. 애니메이션 별로 구분해 놓고 다양한 굿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책들도 볼 수 있었는데 일본어를 알지 못해 아쉬웠다.


이온몰 교토에 있는 잡화점


건담의 세계에서 네 시간 가까이 지내는 동안 어찌나 행복해하던지. 아이가 건담에 몰입한 모습과 웃는 소리, 감탄하는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우리도 배고픔을 잊을 만큼 즐거웠는데 본인은 얼마나 더 즐거웠을까 싶다. 아이는 이제 만족했는지 숙소행을 외쳤다. 돌아가는 길에 배고프다고 해서 쇼핑몰 안에 있는 라멘집으로 갔다. 숨도 안 쉬고 코 박고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아이는 어린이 세트로 나온 라멘과 밥 한 공기, 바나나 젤리까지 뚝딱 먹었다. 좋아하는 걸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던데, 배고픈 줄 모를 정도라니 아이에게 건담이 어떤 존재인지 또 한 번 느꼈다.


돌아가는 지하철 안은 퇴근시간도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많았다. 한 자리가 났길래 아이를 먼저 앉혔다. 가다가 또 한 자리가 났다. 이번에는 내가 앉았다. 복도를 두고 옆에 앉았는데 엄마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앉아있는 것이 아홉 살 인생에서 큰 도전인 것처럼 보였다. 여행 와서 낯선 것들 투성이인 곳에서 아이는 크고 작은 도전들을 해내며 한 뼘씩 성장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뿌듯하면서도 뭉클했다.


그렇게 우리의 9주년 결혼기념일은 건담으로 시작해 건담으로 끝이 났다고 한다. ^-^


늦은 점심으로 먹었던 라멘 / 지하철에서 자리에 혼자 앉은 아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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