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져도 사랑은 남아

by 원지윤
꽃은 져도 사랑은 남아


비가 온 뒤, 길 위에 피어난 또 하나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아스팔트 바닥에 움푹 팬 웅덩이. 그 둘레를 빙 둘러싸고 뿌려진 작은 꽃잎들. 누군가의 손길이 만든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한 것도 아니다. 그저 흘러온 시간의 결과물이다. 어쩌면 우연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찰나. 그런데 나는 그 자리에 발을 멈췄고 눈을 맞췄고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이 사진은 한 장의 기록이 되었다.


제목은 <꽃은 져도 사랑은 남아>. 처음 이 사진을 찍고 난 뒤, 제목을 붙이기 전까진 그 감정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슬프다고 하기엔 너무 고요했고, 아름답다고 말하기엔 너무 쓸쓸했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꽃잎 사이로 보이는 어두운 웅덩이를 오래 들여다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꽃은 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건 사랑 같다고. 떠난 것이 다가 아니라, 남은 것이 있었다. 지는 건 끝이 아니라, 기억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 순간, 한밤비 작가의 그림책 『흔적』이 떠올랐다. 『흔적』은 존재와 부재 사이, 머물렀던 것과 떠난 것 사이를 다룬다. 이 책의 주인공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가 바라보는 흔적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한결같은 소리, 타오르던 불꽃, 구겨진 이불의 결. 아무 말도 없지만,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가 선명히 느껴진다. 떠난 자의 그림자는 없지만, 남은 자의 시선은 있다. 그 시선이 흔적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만든다.


사진도 그렇다. 꽃잎이 흩날린 길, 그 아래 고인 물웅덩이는 마치 마음의 그림자 같다. 봄날의 정점에서 떨어져 버린 꽃잎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딘가를 감싸고 있다. 흩어지지 않고, 흘러가지 않고, 함께 남는다. 마치 사랑처럼. 사라지는 순간에도, 남겨지는 마음. 꽃은 졌지만, 사랑은 남아 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이별을 떠올리게 하고, 동시에 아주 오래된 기다림을 불러온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가 남는다는 말에 위로를 얻는다. 하지만 정말 위로가 되는 건, 그 흔적이 사라지지 않으려 애썼다는 사실이다. 『흔적』의 마지막 장면에서, 화자는 사라진 존재가 지나간 흔적에 시선이 머문다. 그 흔적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고이 간직하며. 그리고 마침내 화자도 그 길에 자기 자취를 얹는다. 그렇게 삶은 이어진다. 누군가 남긴 흔적 위에 또 다른 삶이 덧그려지며.


이 사진을 찍은 날, 나는 그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아름다움이 사라질까 봐, 이 감정이 희미해질까 봐. 그래서 셔터를 눌렀고, 그래서 그 자리에 제목을 붙였다. <꽃은 져도 사랑은 남아>. 이제 나는 이 말을 믿는다. 진다는 건 끝이 아니다. 꽃은 언젠가 다시 피고, 사랑은 그 사이를 건너 남는다. 때로는 흔적으로, 때로는 기억으로, 때로는 말 없는 사진 한 장으로.


그러니, 이제는 두렵지 않다.

사랑하는 것들아, 너희가 언젠가 지더라도.

나는 그 흔적 속에서 다시 피어날 수 있을 테니.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