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관계에서 무게 중심 찾기

엄마-오빠-나

by 원지윤

엄마와 오빠는 같은 도시에 산다.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길을 오간다. 같은 속도로 늙어간다. 나는 제주에 산다. 비행기 표와 일정과 아이의 시간표를 한 번 더 계산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이 거리 하나만으로도 엄마–오빠–나의 삼각형은 이미 기울어 있다.


엄마의 생활은 오빠 쪽에 붙어 있다. 오빠와 세차장을 같이 운영한다. 그곳에서 번 돈은 먼저 대출 상환으로 들어가고, 엄마에게 남는 건 용돈 정도다. 세차장 명의도 오빠랑 엄마 공동이고, 다른 빌딩도 그렇다. 엄마의 내일은 오빠의 오늘과 같은 장부 위에 적혀 있다.


그 구조를 아는 순간, 엄마의 노후가 왜 늘 오빠와 함께 말해지는지도 이해가 됐다. 엄마는 사람보다 확실한 것을 붙잡아야 안심하는 쪽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 확실함은 대개 돈과 명의였다. 노후는 준비가 아니라 방어이고, 그 방어를 가능하게 해주는 건 ‘연금’ 같은 단어가 아니라 ‘명의’ 같은 단어였다. 엄마의 세계에서 안전은 감정이 아니라 소유와 가까웠다. 그런데 그 안전장치가 오빠 쪽으로 붙을수록, 내 쪽에는 다른 것이 붙는다. 죄책감과 권한 없는 책임.


엄마의 전화는 늘 안부로 시작하지만, 중간부터 결이 바뀐다.

“거기 날씨 어떠니?”
“아이는 잘 지내고?”

잠깐 숨을 쉬게 해주고, 그 다음에는 꼭 하나가 따라온다.
“오빠가 요즘 힘들어.”
“세차장이 빚이 많아서.”
“사람 쓰는 것도 그렇고.”

“네가 좀 말해주면 안 되니?”


그 순간 나는 늘 같은 자리에 서게 된다. 엄마와 오빠 사이의 빈 공간. 아무도 맡고 싶지 않은 역할이 공기처럼 나를 찾아오는 자리. 나는 그 역할을 너무 오래 해왔다. 설명하고 설득하고, 감정을 중재하고, 서로의 언어를 번역하는 일. 우리 집에서 나는 종종 딸이라기보다 통역사가 된다.


“엄마, 그건 오빠랑 엄마가 직접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한 박자 늦게 대답한다. 그 한 박자에 엄마의 계산이 들어 있는 걸 나는 안다.

“그래도 네가 말하면 좀 듣잖아.”

그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배치다. 너는 아직 내 편이 될 수 있는 사람. 너는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카드. 이상한 건, 내가 제주에 있다는 사실이 엄마에게는 때로 면제가 아니라 예비처럼 취급된다는 것이다. 엄마와 오빠의 도시 생활권 안에서 돈과 명의와 결정은 돌아가는데, 내 제주에는 정서와 효가 머문다. 나는 현장에 없어서 결정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일이 커질수록 내게는 '가족이니까'가 더 쉽게 건네진다. 마치 멀리 있는 내가 더 깨끗한 마음으로 희생할 수 있을 것처럼.


엄마는 가끔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너는 제주에 살아서 좋겠다.”
그 말이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호한 방식으로. 좋겠다는 말 뒤에는 종종 이런 결론이 붙는다.
“그러니까 네가 좀 더 이해해야지.”


내게 제주가 ‘삶’이 아니라 ‘여유’로 번역되는 순간, 나는 숨이 막힌다. 제주에 온 건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었다. 남편 발령 때문에 따라온 삶이었다. 도망쳐온 것도, 가벼워진 것도 아닌데, 말 한마디로 나는 ‘여유 있는 사람’이 된다. 비행기표 값과 시간, 아이의 일정, 일을 미루는 비용, 급한 상황에 바로 뛰어갈 수 없다는 무력감. 멀리 있다는 건 가벼움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무게다.


엄마가 저울질을 하는 방식은 결국 간단하다.
오빠는 '같이 세차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라서 무게가 실리고, 나는 '멀리 있지만 결국 딸인 사람'이라서 또 다른 무게가 실린다. 오빠에게는 자산과 명의가, 나에게는 죄책감과 정서적 의무가 돌아온다. 이 배분이 가장 잔인한 지점은, 권리와 책임이 같은 사람에게 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엄마의 말 속에는 늘 ‘노후’가 숨어 있다. 직접적으로 꺼내지 않아도, 모든 문장이 결국 그쪽으로 모인다.


“너희는 나중에…”
“내가 아프면…”
“나는 누가…”

그 문장들이 쌓일수록, 나는 내가 딸이 아니라 보험상품처럼 평가받는 기분이 든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엄마가 불안해서. 하지만 그 불안이 내 삶의 기본값이 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나를 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삼각관계의 무게 중심을 '맞추는' 대신 '찾는' 연습을 한다. 찾는다는 건 인정하는 일이다. 지금 이 관계는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나는 어떤 역할로 고정되어 있는지, 엄마가 어떤 방식으로 나를 호출하는지. 그리고 그 호출에 내가 매번 자동으로 응답하지 않는 연습.


엄마에게는 선이 불편하다. 엄마에게 선은 거리이고, 거리는 배신이 되기 쉽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선을 세우기로 했다. 선을 세우는 건 엄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해서다.


“엄마, 나는 제주에 있어서 지금 당장은 못 가.”
“엄마, 오빠 문제는 내가 중간에서 해결할 수 없어.”
“엄마,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이만큼이야. 이 이상은 안 돼.”


말은 짧지만 속은 길게 흔들린다. 죄책감이 먼저 올라오고, 그 뒤에 방어가 따라오고, 아주 작은 안도감이 남는다. 내가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감각. 이 감각이 내가 찾는 무게 중심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엄마도, 오빠도 아닌 곳. 내 삶이라는 바닥 위에 놓인 중심. 가끔은 생각한다. 엄마가 우리를 저울질하는 건 결국, 엄마가 세상에서 배운 방식이 그것뿐이라서일지도 모른다고. 안전을 확보하려면 누군가를 잡아야 했고, 잡을 수 있는 사람은 가족뿐이었던 시대를 살았으니까. 그 이해는 가능하다. 하지만 이해가 곧 내 인생의 담보가 되지는 않는다.


엄마–오빠–나의 삼각형에서, 나는 이제 후보로 서지 않기로 한다. 나는 딸로 서고 싶다. 딸은 후보가 아니라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여전히 마음은 복잡하다. 엄마가 전화를 하면, 고마움과 피로가 동시에 올라온다. 그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고마움과 피로가 동시에 올라오는 이 마음이, 내가 아직 딸이라는 증거이면서ㅡ 이제는 딸로 남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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