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으로 지키는 딸의 생존
스무 살이 되던 해,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죽어도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집은 원래 쉬는 곳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내게 집은 쉬는 곳이 아니라 순서였다.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 누가 편해도 되고, 누가 불편해도 되는지. 그 순서가 매일같이 확인되는 곳이 집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다. 합격 통지서를 받자마자 나는 자취방부터 알아봤다. 설렘이 아니라 숨이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집에 있는 게 싫었다.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오빠가 지금의 새언니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었고, 둘은 우리 집에서 데이트를 했기 때문이다. 거실은 두 사람의 것이었고, TV는 내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나는 방 안에서만 있었다. 둘 사이에 끼는 것도 애매했고, 끼고 싶지도 않았다.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것도 하루이틀이었다. 일주일 내내, 하루 종일 밖에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생각해낸 탈출방법은 알바였다. 집 밖으로 나갈 이유가 필요했고, 내 시간을 내가 쓰는 감각이 필요했다. 그러나 엄마는 반대했다. 그 시간에 토익을 공부하라는 전략을 짜주었다. 지겨웠다. 그놈의 공부. 그때의 공부는 내 미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내 현재를 참아내기 위한 핑계처럼 느껴졌다.
내가 방에서 나올 수 있는 건 화장실을 갈 때거나, 엄마가 퇴근한 이후 저녁식사를 할 때 였다. 집은 있었지만, 내 자리만 없었다. 집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살기'가 아니라 '조용히 있기'였다. 그러다 결국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오빠랑 새언니가 집에 계속 있는 너무 불편하다고 했더니, 엄마는 그랬다.
"참아라, 나가면 다 돈이라서 그래. 쟤들이 무슨 돈이 있겠니."
"집에서 데이트하는 게 기특하지 않니."
그 말은 결국 이런 뜻이었다. 네 불편은 네가 감당하면 된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나보다 오빠가 먼저였고, 그 우선순위는 지금도 유효했다.
며칠 후 나는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저는 서울로 올라갈게요."
그렇게 쫓겨나듯, 도망치듯 첫 자취생활이 시작되었다. 심지어 집을 계약하고 들어가기로 한 날, 엄마는 큰 캐리어에 짐을 싸서 혼자 버스를 타고 올라가라고 했다. 군말없이 그렇게 했다.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필요한 건 알아서 사라며 카드 한 장을 쥐어줬다. 뭘 사야 할지도 모르는데,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집을 떠나면서도 나는 내 안의 '딸'을 끌고 나왔다. 허락을 구하고, 납득을 시키고, 먼저 죄책감을 느끼는 딸.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하루 이틀 살다 보니 살아졌다. 좋았다. 집안에서 숨을 줄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누가 리모컨을 잡든, 누가 거실을 차지하든, 그게 내 삶의 규칙이 아니라는게 좋았다.
개강이 다가왔고, 대학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았다. 그 잉여시간에 나는 알바를 하겠다고 했다. 편의점 야간알바였다. 실험 수업이 끝나면 저녁 6시였고, 그 이후에 할 수 있는 일로 딱이었다. 엄마는 또 말했다.
"밤에 돌아다니지 마라."
"그 시간에 공부해서 장학금을 타라. 그게 돈 버는거다."
합리적이긴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원했던건 돈 만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이 필요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지못했고, 그래서 모든 걸 엄마와 상의했다.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는 나이였는데도, 나는 늘 허락을 구했다. 그게 내 잘못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나는 서울에서 버텼다. 취업 준비라는 명목으로, 내 집을 지켰다. 2년의 방황 끝에 취업을 했고, 일 녀만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집을 떠났다. 이번에는 도망이 아니라 선택 같아서, 훨훨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엄마의 속삭임은 다시 시작됐다. 친정 옆으로 이사 사오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서울에서 남편과 둘이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힘들었다. 낮은 거의 독박이었다. 남편이 오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옷을 입고 나가곤 했다. 그렇게 한두시간을 걷다보면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이가 크면서 외출을 하게 되어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마트나 도시관을 전전했고, 카페와 성당에서 시간을 떼웠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했다. 하지만 내 동기들은 연차가 쌓여갔고, 나는 후퇴하는 기분이 들어 그게 참기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했다. 책을 읽는 것 뿐이었다. 아이를 등에 매고 책을 읽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엄마는 말했다.
"바보야, 내려오면 내가 봐준다니까.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되는데 왜 안내려온다는 거야."
조건만 보면 내려가도 됐다. 친정도 수도권이었고 남편 출퇴근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엄마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엄마는 우리 집에 오는 즉시 현관부터 싹 청소를 시작했다. 싱크대며 거실이며 옷장까지 다 끄집어내서 자기 식대로 정리하고 버렸다. 멀리 살아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와서 이렇게 했다. 같은 동네에 살면 얼마나 숨이막힐까. 나는 그 장면이 너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때 나는 알았다. 엄마가 주는건 '도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식'이었다. 도움이 들어오는 순간, 내 집의 룰이 바뀌었다. 내가 만든 질서는 무너지고, 엄마의 질서가 들어왔다. 나는 엄마가 오면 고마운데 피곤했고, 엄마가 안 오면 편한데 서운했다. 이 모순은 내 마음을 오래 흔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악물고 버텼다. 울면서도 다짐했다. 다짐에 다짐을 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그 다짐을 하는 동안 아이는 쑥쑥 커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친정의 도움이 절실하지 않게 되었다. 도움이 없으면 없는 대로, 상황에 맞춰서 키우게 되었다. 정말 그렇게 살아졌다.
그래서 지금 나는 스무 살 이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이 결심은 엄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오늘도 마음은 복잡하다. 엄마를 떠올리면 여전히 고마움과 피로가 동시에 올라온다. 그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고마움과 피로가 동시에 올라오는 이 마음이, 내가 아직 딸이라는 증거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