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품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
나는 아홉 살에 큰외삼촌네 집에 얹혀 살았다. 군식구였다. 밥상은 함께였지만 내 자리는 늘 한 칸 비켜 있었다. 누구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존재해야 했다. 고마움은 말로 듣기 전에 먼저 공기처럼 배웠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때, 오빠가 중학교 2학년이던 때 우리를 데리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 부푼 꿈을 안고. 어른들은 그걸 ‘도전’이라고 불렀고,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따라갔다. 엄마의 결심은 단단해 보였고, 그 단단함이 우리를 끌고 갈 거라 믿었다. 1년 뒤 IMF가 터지면서 이민 생활은 유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빠가 남겨둔 돈은 온데간데없었다고도 했다. 오빠는 한국에 들어오기 싫어했다. 결국 급한 대로 나와 엄마만 먼저 들어왔다.
문제는 돈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호기롭게 떠났던 길에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얼굴로, 처음 떠났던 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그걸 견디지 못했을 거다. 엄마의 자존심이라는 말로만 정리되지 않는, 어떤 무너짐.
회피인지 현실인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서울로 돈을 벌러 간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큰외삼촌댁에 맡겨졌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보러 오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믿는다는 건 기다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나는 잠수하듯 숨을 참으며 일주일을 살았다. 하루를 사는 게 아니라, 일주일을 버티는 느낌이었다.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숙제를 하고 잠을 자는 사이사이에, 나는 엄마가 오는 장면을 수도없이 그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 발소리,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그 상상이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오지 않았다. 그리움이 사무쳐 눈물이 날 때면 어른들은 말했다.
“또 우냐. 다 컸는데 울면 어떡하냐.”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단속이었다. 울음은 금지였고, 그리움도 금지였다. 나는 눈물뿐 아니라 그리움까지 삼키는 법을 배웠다. 삼키는 일이 익숙해지면, 사람은 겉으로 빨리 큰다. 속의 아이는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오빠가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우리 세 식구는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다시 한집에 살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하지만 함께 산다고 해서 그 일 년이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기다림은 시간이 아니라 감각으로 남는다. 오겠다고 말한 사람이 오지 않았던 감각. 기다리는 내가 틀린 사람 같았던 감각. 그래서 나는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엄마를 쉽게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와 함께 있어도 마음 한쪽이 늘 먼저 대비한다. 언제든 또 혼자가 될 수 있다고. 그래서 결혼을 할 때 서운함보다는 언제든 혼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에서 해방되는 것 같았다.
그리워지는 건 어쩌면 엄마가 아니라, 그때 끝내 오지 않았던 '품'인지도 모르겠다. 엄마 품이 그리워질 때마다 내 안의 아홉 살이 먼저 고개를 든다. 그 아이는 아직도 일주일을 세고 있다. 엄마가 오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달력 어딘가에 표시해둔 채로. 그래서 이제야 안다. 그리움은 사랑의 증거라기보다, 내 안의 어린 부분이 아직 살아 있다는 징후에 가깝다. 그 어린 부분은 울고 싶어 한다. 그런데 동시에, 울면 안 된다는 말을 너무 잘 기억한다. 다 컸는데 울면 안 된다고, 참아야 한다고.
함께 살게 된 뒤에도 그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움은 채워지는 감정이 아니라, 오래된 결핍 위에 자라는 감정이었으니까. 나는 아직도 가끔 그 질문을 한다. 이번에는 올까. 이번에는 정말 내 편일까. 나는 그 질문을 지우지 않기로 한다. 질문이 남아 있다는 건, 내가 그 일 년을 아직도 통과하는 중이라는 뜻이니까.
언젠가 내 안의 아홉 살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울어도 됐다고. 그리워해도 됐다고. 기다린 게 잘못이 아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