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개천절 아침에 새벽 비행기로 무탈하게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발리 우붓 여행기 1탄 시장 에피소드입니다.
여행 사흘 차에 우붓 전통시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살만한 특산품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죠. 아마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필수로 들르는 코스일 텐데요. 이런 곳에서는 늘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야 합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관광지 시장 상인들과 치열한 눈치싸움을 해야 하니까요. 저와 아내는 아이들을 벤치에 남겨두고 좁은 골목길을 돌며 물건들을 스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식탁에 놓을 수저와 테이블 매트 세트를 하나 발견하게 되죠. 디자인도 괜찮아 보였습니다.
아내가 관심을 가지고 물건을 들어서 제게 보여주는 순간 가게 안쪽에 앉아있던 주인아주머니가 부리나케 이쪽으로 달려옵니다. 마치 축지법을 쓰듯 말이죠.
이제부터는 제가 활약할 시간이 시작됩니다. 제가 먼저 묻죠.
"How much is it?"
그러자 아주머니는 아무런 대답 없이 어디서나 통용되는 세계 공용어를 쓰기 시작합니다.
바로 분주하게 손놀림으로 숫자가 찍혀있는 계산기였죠.
거기에는 380,000이라는 숫자가 찍힙니다. 이 상황에서의 핵심은 계산을 빨리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계산이 오래 걸리면 어리숙해 보여 다음 단계가 어려워지니까요.
인도네시아 환율을 계산하는 방법은 0을 하나 제외한 뒤 0.9를 곱해주면 한화와 얼추 비슷합니다. 그러면 대략 3만 4천 원 정도 내라는 소리죠. 요즘 한국의 물가가 꽤 올랐기에 그리 비싸 보이지 않는다며 지갑을 꺼내실 생각이라면
당신의 등급은 하수입니다. 반성하십시오. 주위 사람들이 호구로 볼 수 있으니 각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일단 저는 관광지 상인들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특히 동아시아 관광객들은 그들에게 봉이니까요. 곧바로 기본 스킬이 들어갑니다.
그 이름은 바로 도리도리 스킬.
그 숫자를 보자마자 단호하게 고개를 도리도리하면 하면 되죠.
아주머니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는 우리 속담을 아는지 바로 다급하게 계산기에 새로운 숫자를 입력합니다.
오!! 이번엔 340,000루피아군요.
고개를 저었을 뿐인데 4천 원 정도 할인이 되었으니 효율이 좋습니다. 여기서 기뻐하며 '오케이!'라고 말했다면
당신은 중수입니다. 노력이 더 필요합니다.
여기서 또 한 번 스킬이 들어갑니다. "Sorry, it's expensive"라고 말한 뒤 가게를 나가려고 합니다. 표현이 어려우면 그냥 "쏘리"라고 해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자 이제 칼자루 아니 계산기는 제 손으로 들어옵니다. 눈빛으로 "얼마까지 해주면 살 건데?"라며 저를 강렬하게 쳐다봅니다.
하지만 이때가 제일 고민이 되는 순간입니다. 마냥 물건값을 후려치자니 장사하시는 분과 감정이 상하고 큰소리가 날까 봐 걱정이 되고 아주 조금만 깎자니 여기까지 온 수고로움이 아까우니까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1. 처음 값에서 절반으로 후려친다.
2. 처음에 깎아준 값만큼 한 번 더 깎는다.
저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2번을 선택했죠. 막판에 마음이 약해지는 제 자신이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240,000까지 두드려서 다시 사장님께 역제안을 해봅니다.
하지만 그녀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겠죠? 고개를 저으며 다시 270,000을 누릅니다. 이 정도까지 오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시 240,000을 눌러서 줍니다. 그러면서 가볍게 한 마디를 더 하면 됩니다.
"No? Sorry."
이렇게 말한 뒤 쿨하게 가려는 제스처만 취하면 되죠. 지금 고른 물건은 다른 가게에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오면 대부분 거래는 완료됩니다. 이미 주도권은 사는 사람이 가져왔거든요.
결국 240,000루피(약 21,000원)에 대장정을 마칩니다. 이 값도 아주 저렴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정도로 마무리하기로 했죠.
평소 이 단계까지 오신 분들이라면 축하드립니다. 고수의 반열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적어도 관광지에서 눈퉁이 맞을 일은 별로 없겠군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저희가 쇼핑하는 시간 동안 벤치에 앉아 기다리던 아이들에게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희가 물건을 샀던 그 가게에서 일어난 일이었죠. 한국인 관광객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거기로 들어갔고 그 아주머니를 상대했다고 합니다. 220,000루피짜리 물건을 고른 뒤 300,000루피를 줬는데 돈을 받자마자 원래 300,000루피였다고 하면서 거스름돈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4인 가족이었던 그분들은 연신 "what?"이라고 하면서 항의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고 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들은 체 만 체하시면서 다른 일을 하더라는군요. 결국 그분들은 지쳐서 포기하고 그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이 사건에 대한 전후 사정을 전해 들으면서 여행지에서는 이런 식으로도 앉은자리에서 코를 베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소중한 노하우를 하나 더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작은 돈 위주로 가지고 다니면서 거스름돈이 최소한이 되게끔 금액을 맞춰서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죠.
저도 제법 흥정의 고수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건으로 많이 배웠습니다. 여행지에서는 다양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말이죠. 여행도 즐거웠지만 정말 인상 깊었던 장면이었기에 이 이야기를 첫 번째로 다뤄봅니다. ^^
한 줄 요약 : 시장에서 우리는 나 자신에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 있을뿐더러 인생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