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머나먼 나라에서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려왔는데요. 덴마크 오픈에서 안세영 선수가 준우승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부상은 물론 협회의 갑질과 같은 여러 대소사들이 겹쳐서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참 대견했습니다. 거기에 빼앗겼던 세계 랭킹 1위 자리도 찾을 수 있었죠.
하지만 안세영 선수의 폭로 이후 구습이 타파되리라 믿었지만 딱히 달라지는 부분은 없어 보여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8월 5일에 폭로를 했으니 100일이 다 되어가도 법적인 책임은 물론 사임하는 사람도 없죠. 나는 그만둘 정도로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입니다.
그런 와중에 배드민턴 협회장은 국정감사장에서 한 국회의원의 힐난 어린 질문에 "이번 덴마크 대회 가서도 선배들이나 코치진들에게 인사하지 않았다고 연락이 왔다"라며 답을 해서 놀라움을 자아냈습니다. 자신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는 심부름꾼이 있다는 말이겠죠.
저도 꼰대 소리를 듣는 나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인사하지 않는 후배는 당연히 싫어합니다. 하지만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국정감사 같은 곳에서 나올 소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미 배드민턴 협회를 조사하면서 안세영 선수가 선배들의 빨래 심부름까지 했던 적이 있다고 밝혀졌으니 단순히 시스템에 대한 문제만이 아닌 사람에 대한 문제이며 패거리 문화나 선후배 간 강압적인 문화가 얼마나 심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큰마음을 먹고 금메달을 딴 순간 제보를 했지만 그 용기에 미안해하기는커녕 배신자라는 프레임으로 안에서 더욱 고립시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 회사에는 레드휘슬이라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단어의 어감에서 느끼시겠지만 내부고발 시스템입니다. 규모가 큰 회사니까 인원도 많고 생각은 다르고 도덕성까지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규정을 넘어 법적인 선을 넘는 경우도 충분히 생길 수 있죠.
그런 경우 감사 부서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 없기에 직원들용 신고 시스템을 만들어서 운영합니다. 명칭이 다를 수는 있지만 다른 기관들에서도 대부분 레드휘슬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고발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한 가지 슬픈 공통점을 굳이 꼽으라면 이 '시스템이 유명무실하다'라는 점이겠죠.
외부에서는 내밀한 비리를 알기가 어렵기에 딱히 영양가 있는 제보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결국 내부에서 나와야 하는데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고발을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지 말라는 말이 있듯 이런 행동은 조직 내에서 용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말 어마어마한 용기도 필요하죠. 어떤 용기냐 하면 바로 '회사를 그만둘 용기'입니다. 그런 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쉽게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큰 마음을 먹고 신고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마음이 없더라도 대부분 내부고발자의 최후는 비슷합니다.
안세영 선수 같은 경우에는 인지도가 높기에 국민들과 여론이 지켜줄 수 있는 상황이지만 대부분의 내부고발자들이 겪는 현실은 결코 정상적이지 못합니다. 공익제보임에도 신분이 밝혀지는 경우는 많으며 보복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죠.
ㅇ 업무와 실적과 무관한 인사 조치
ㅇ 명령 불복종, 위계질서 문란, 외부에 비밀 유출(신고 내용)을 이유로 징계
ㅇ 욕설, 고성을 비롯해 상급자가 신고한 사람을 따돌리라고 종용
ㅇ 휴가 등 근로 복지에서 불이익
ㅇ 사소한 업무에서 괘씸죄를 적용
결국 어떤 수를 써서든 회사를 그만두게 만들어 버리죠.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내부고발자가 자주 등장하지만 그건 픽션이라서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혼동하지 마세요.
거기에 양심과 직장을 걸고 제보를 하지만 제보자에 대한 제대로 된 대가는커녕 대가조차 또한 턱없이 부족한 점도 문제입니다. 준법경영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지만 부실한 제도가 더욱 이런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울시처럼 보상금 지급한도를 아예 없애버리는 방법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겠죠. 한 언론사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내부고발로 언론에 언급된 사람들 100명을 전수조사 해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만족스럽게 사건이 마무리되었다고 말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하죠. 양심을 지킨 대가로 되려 경제적으로 힘들어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청렴하고 깨끗한 사회가 허공에 대고 외치는 메아리로 끝나지 않기 위해 이런 양심적인 내부고발자들을 지켜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리고 내부고발자의 훌륭한 사례로 기억되기 위해서라도 안세영 선수의 폭로가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속 시원하게 해결되기를 빌어봅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보기에도 정말 창피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