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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세우스 Apr 16. 2022

자전거와의 전쟁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평소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 친구 식구들과 뜻하지 않게 길지 않은 구간으로 자전거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극(?)의 발단은 대략 이렇습니다. 그분들 평소에 경기도 구리에 따로 마련해둔 텃밭에 자주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도 가보고 싶다며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쌍둥이들, 특히 첫째는 할아버지가 평소 가꾸시는 텃밭을 꼭 자신이 물려받겠다고 할 정도로 시골의 삶을 사랑하는 아이입니다.

텃사모(텃밭을 사랑하는 모임)

 

 결국 저희는 그 가족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초대해주신 부부께서는 자전거를 타고 가시겠다고 하셨고 덩달아 저도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가겠노라고 화답을 해버린 것이죠. 그 부부는 주말마다 자전거를 타고 서울 각지를 돌아다니실 정도로 뛰어는 라이더였지만 저는 요즘 체력이 시원찮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된 건강관리를 하지 않았지만 믿는 구석은 있었습니다. 일단 제가 다른 근육은 부실하지만 허벅지 근육은 그나마 나쁘지 않았다는 점과 거기에 제가 탈 자전거가 작년에 새로 장만한 전기자전거라는 점이었죠. 게다가 구간도 그리 길다고 생각되지 않아 괜찮겠다 여겼습니다.

내 오늘 목숨줄


 일단 이번 여행의 멤버는 총 7명입니다. 선발대인 저와 아이 친구의 엄마, 아빠는 자전거로 이동합니다. 아이 엄마, 쌍둥이, 아이 친구 이렇게 네 명은 후발대로 먹을 것들을 싣고 차로 이동하게 된 것이죠.

만만하게 생각한 이동경로


 언제나 그렇듯 시작은 늘 순조롭습니다. 틈틈이 오르막길에서는 전기의 힘을 이용하면서 기에 초반 20분은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0분 정도 지났을까요?


 엉덩이에 조금씩 안장의 압박을 느끼고 페달을 돌리는 허벅지에 욱신거리는 느낌이 나기 시작합니다.

 몇 달 사이에 또 체력이 더 떨어진 모양입니다. 안타깝지만 지금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전기자전거의 힘은 의외로 장거리 행에서 그렇게 큰 조력이 되지 못합니다.


 기초적인 체력이 없으면 기계의 힘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죠. 지금 이 순간 닥터 스트레인지가 가진 타임스톤의 힘이 간절합니다.

타임스톤!! 한 시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다오!!!!!


 최종 목적지인 텃밭에는 출발한 지 1시간 여만에 도착합니다. 제게는 10시간 같은 1시간이었네요. 널찍한 텃밭에 아이들이 뛰어다니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저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12.7초 정도는 듭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돼버린 제게 모든 어른들과 아이들이 타박을 줍니다. 그러니까 그냥 차를 타고 오지 그랬냐고 말이죠. 딱히 반박할 말이 없기에 묵묵하게 듣고 있습니다. 저란 사람은 그런 타박도 잘 경청하는 남자니까요.

그래도 오길 잘 했어요.


그래도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요. 벚꽃을 보내준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이 헛헛했는데 보기 드문 배꽃이 반갑게 저를 맞아주네요. 자주 보지 못하는 광경이라 잠시 망중한에 빠져봅니다.

벚꽃 대신 배꽃



 그야말로 너덜너덜해져서 녹초가 된 몸으로 다 함께 점심을 만들어서 먹습니다. 다른 들이 열심히 준비해준 고기를 구워서 입에 넣기만 합니다. 원래 제가 남이 해주는 것만 날름 먹는 얌체가 아니지만 오늘은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 말 많은 사람이 말이 없어질 정도니까요.


 식사를 마친 후에는 더 가관입니다. 분명히 잠시 누워있겠다고 한 것이 그 짧은 시간 동안 코를 골면서 잤다고 합니다. 맨바닥에 돗자리를 하나 깔고 잘 수 있다니 저라는 사람의 잠재력은 정말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숙자 저리가라할 정도의 해괴한 모습, 그와중에 코도 골았다고 하네요.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서쪽으로 퇴근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과연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시험해볼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냥 오늘 여기에 자전거를 두고 가라는 조언도 나오지만 그건 또 자존심상 허락하지가 않네요.

 어차피 오늘 몸을 마구 굴린다고 하더라도 내일은 일요일인 데다 무서운 '잔소리 없는 날'이니 오후 3시까지 자면 되지 않을까?라고 제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해봅니다.

해가 사라져가는 왕숙천(구리)


집으로 돌아오는 1시간여 동안의 시간 역시 갈 때만큼 순탄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전기자전거의 배터리가 출발한 지 10분 만에 방전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막막하고 아찔합니다. 기가 막히고 코도 막히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글감이 풍부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나의 고생은 브런치 글의 축복이지요. 이렇게 연결시킬 수 있다니 브런치 글을 하도 많이 쓰면서 저도 정신이 약간 이상해지는 모양입니다.

고덕구리대교(공사중)의 명과 암

 

 간이 갈수록 페달을 돌리는 다리는 감각이 점점 사라집니다. 그와 동시에 무아지경에 빠져듭니다. 지난 글에서 강조했던 멍 때리기가 자동으로 되네요. 자전거는 10분을 가다 서다를 반복합니다. 힘들어서이기도 하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이 고통을 기록으로 잘 남기려면 사진도 중요하기 때문이죠.

오늘 3800번째 손님!! 나는야 럭키가이!! 하지만 그게 뭣이 중헌디!!


 자전거와의 치열한 전쟁 끝에 드디어 즐거운 우리 집에 도착합니다. 역시 집이 최고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 좋은 집을 두고 밖으로 돌아다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듭니다. 아마 저는 오늘 밤 '레드썬'을 해서 최면을 걸듯 기절해서 잠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밤에 끙끙거리는 소리도 낼지 모르죠.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깊게 새기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뛰쳐나간 대가를 이틀 정도는 치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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