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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와의 전쟁(2탄)

스압(스크롤 압박) 주의! 분량 조절 실패했습니다.

by 페르세우스

1탄에 이어서 계속

https://brunch.co.kr/@wonjue/203




오늘은 양해해주신다면 특별히 일기 형식으로 적어보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일단 팔다리의 감각부터 확인했다. 어제 무모했던 2시간 반 동안의 자전거 여행이 가져다준 후유증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다행히 아직 뻐근한 정도 이외의 문제는 없는 것을 보니 나도 아직은 죽지 않은 모양이다. 덕분에 일어나는 순간의 기분은 약간은 상쾌하기까지 했다.

어제 동안의 기록, 어플을 늦게 켜서 실제 거리는 42km 정도 됐다.

https://brunch.co.kr/@wonjue/205





하지만 그런 기쁨은 잠시 뿐이다. 시간은 어느덧 10시, 거실의 이상할 정도로 적막한 공기는 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내 불안함의 원천을 향해 조심스레 걸어간다. 아이들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판도라의 상자(아이들 방문)


그냥 계속 자고 있기를 바란 모양이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이 스마트패드를 가지고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다. 평소에는 시끄럽게 소리를 내면서 하던 녀석들이 숨죽이고 하는 것을 보니 아직은 눈치를 보긴 하나보다.


방으로 슥하고 들어온 내 얼굴을 보면서 살짝 놀라는 눈치다. 하지만 멍하게 헛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않는 나를 보며 금방 화면에 얼굴을 묻은 뒤 말을 건넨다.


"아빠, 이제 일어났어요?, 엄마는 밖에 나간 거 알아요?"


'이게 무슨 소리지? 이 아침에 어딜 나갔지?'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하려는데 거실의 화이트 보드판에 무언가가 떡하니 적혀있다.

커피 평소에는 마시지도 않는 양반이................


나는 배신감에 젖어든다. 잔소리 없는 날을 피하기 위해 미리 집에서 탈출한 것이 아닌가 하는 굉장히 범죄심리학적으로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밀하게 계획된 배신이라고 정의 내리며 처절한 응징을 다짐해본다.


어쨌건 간에 일단 이제 이 집에는 남자 세 명밖에 없고 아침 준비를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잠시 고민해본다.


잔소리 없는 날에 아이들과 최종 합의한 원칙


1.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2.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3. 눈짓으로 무언의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4. 무언가를 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5. 위험하거나 나쁜 짓이 아닌 경우에는 부탁을 들어준다.



찰나의 고민 끝에 나는 아이들에게 첫 번째 대화를 시도했다.

"너네 아침은 먹을 거니?"

다행히 먹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그리 다행스러운 일인가 싶다. 감사하게도 아이 친구 엄마가 챙겨준 카레는 오늘 아침 한 끼로 충분할 듯하여 아침 준비를 하는 내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준비를 마친 뒤 나는 또 아이들 방을 향해 한 마디를 던진다.


"아, 준비 다 했으니까 이제 아빠는 밥 먹어야겠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건가 하는 일명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잠시 내 뇌를 지배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에 던지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정말 감사하게도 한 번 밖에 말하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나 밥 먹고 할래"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순간적으로 '나란 사람이 저런 말에 감동받는 사람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짧은 감동도 그때뿐이다.

"어? 카레에 호박이 들어가 있네요. 저 그냥 카레 말고 고기 구워주시면 안 돼요?"


물론 냉장고에 고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하는 소리다. 평소의 나 같았으면 이런 제안은 씨알도 안 먹힐 택도 없는 소리다. 카레를 아침, 고기를 점심 메뉴로 알차게 계획을 짜 놓은 입장에서 정말 열 받는 상황이기도 하다. 아마 식사 메뉴를 고민하셨던 분들이라면 이 반찬 투정의 상황을 이해하시리라..


하지만 나는 실없는 웃음과 함께 "알겠어"라고 말한 뒤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낸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다 되면 얘기해주세요" 하며 다시 들어간다. 잔소리 없는 날을 꺼낸 내 입이 웬수지 누굴 탓하겠는가..




고기를 구워서 먹이고 나니 설거지 거리가 또 한가득이다. 이때 나는 나도 놀랄 만큼 번뜩이는 재치를 발휘해보기로 마음먹는다.

"아이고, 어제 자전거 타고 어깨도 아프고 팔도 아파서 설거지를 못하겠네."

아이들 앞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한 녀석은 못 들었는지 쌩~ 하고 들어가 버리고 한 녀석은 옆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대꾸를 해준다.

"아빠, 팔 아프면 그냥 하지 마세요. 그런데 설거지 안 하면 엄마가 화낼 텐데요?"

"그렇지? 그래도 아빠가 아프지만 해야지 어떻게 하겠어."

"그러면 그냥 놔두세요. 저희가 이따가 할게요"


이런 생각을 속으로 한다. 50점짜리 답이다.

'욘석아, 이따가라는 소리는 안 하겠다는 말과 같단다.'

눈치는 아직 국 끓여먹으래야 없어 보인다. 사회생활은 이보다 더 치열한데 설거지에 대해서도 아직 이렇게 모르는 것을 보니 더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나도 놔둘까 하다가 기름때가 낀 프라이팬과 접시가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내가 앓느니 죽어야지. 결국 고무장갑을 자연스럽게 낀다.


아이들이 내가 설거지를 하는 와중에 자신들이 만들어둔 수제 하드를 하나 꺼내서 방으로 들어간다. 조금씩 녹고 있는 나머지 하드들을 보면서 나는 잠시 상념에 사로잡힌다. 분명히 내가 말 안 해주면 저건 녹아버릴 텐데..


녀석들을 향한 소심한 복수를 하려면 아무 말도 안 해야 옳다. 내가 이래라저래라 말을 하는 것은 잔소리니까. 하지만 말을 안 하면 저 세 개는 버려야 한다. 힘들게 만든 것을 아는데..

내 덕분에 살아난 수제 하드(수박맛, 레몬맛, 키위맛)


결국 고민 끝에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세 개의 하드는 무의미한 소멸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좋은 아빠지만 아이들에게 굳이 생색을 내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좋은 아빠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나마 뿌듯해진다.



조금 있다가 아침 댓바람부터 커피 마시러 나가셨던 배신자가 조심스레 집으로 들어온다. 내 레이저 눈빛을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피해낸다. 역시 고수는 다르다.



오자마자 자기들 침대에서 엎드린 상태로 스마트패드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더니 내게 제안을 한다.

"도저히 못 보겠으니 빨리 챙겨서 우리끼리 빨리 나가자!"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 놈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 오늘 막 살 거야"

sticker sticker


아내도 잔소리가 적은 편은 아니기에 순간적인 금단증상이 온 것이다. 그 와중에 아내는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오늘 숙제는 해야 된다고 이야기를 했다가 내게 급하게 저지를 당한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이 인간은 왜 이런 짓을 해가지고'라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결국 다시 우리는 아이들의 점심을 간단히 챙겨두고 쇼핑을 하러 간다. 다행히 녀석들은 순순히 우리를 보내준다. 2시간 여의 쇼핑(내가 필요한 물건은 없다)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출발할 때의 광경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집은 출발 전보다 약간 더 어질러져 있고 이제 스마트 패드는 충전기가 꽂힌 채 아이들과 한 몸이 되어있다.


그나마 감사한 사실은 아이들이 우리가 온 것을 보고 눈치를 보며 아는 척을 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하러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새삼 그 모습을 보아하니 지금까지 내가 스마트폰 안 사준 것은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리고선 아이들에게 숙제를 했는지 물어보려는 아내를 난 급하게 제지한다. 난 약속을 지키는 아빠가 되고 싶으니까 아내도 협조를 해야 한다. 아내는 자기는 괜찮다며 계속 얘기 하지만 이미 얼굴에는 '화병이 나고 있는 중'이라고 쓰여 있다.


아마 내 얼굴에도 그렇게 쓰여있으리라... 말을 아끼라는 말과 함께 아내에게 나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읊어댄다.



"이런 날을 통해서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지를 체크도 해보고 그동안 어른도 평소 말이나 행동에 잘못된 것이 없는지를 체크해보자는 거야!"



너무나도 멋진 말이다. 또 한 번 역사에 남을 명언을 제조한 나 스스로에게 감탄한다. 하지만 말만 아주 그럴싸할 뿐이고 내 뇌 속은 "후회, 현타, 화병, 잔소리"로 가득 차 있다.

윗 어금니와 아래 어금니는 오늘 서너 번 서로 만났지만 다행히도 심호흡과 헛웃음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실없이 웃고 있는 내게 아내는 "이 양반이 드디어 실성을 하셨구먼"이라고 조롱하지만 아직 나는 정신줄을 잡고 있다.

일요일 오후 현재 내 뇌 구조도


결국 오늘 처음 시도한 <잔소리 없는 날>은 오후 18시까지는 단 한 번의 잔소리 없이 지나갔다. 이런 분위기라면 남은 시간도 별다른 일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약속을 지킨 나 자신은 자랑스럽지만 과연 오늘 하루는 우리 가족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는 사색을 통해 찾아야 할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스마트패드를 쥐고 있는 녀석들을 보면서 빨리 잠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잔소리 없는 날 경험자의 최종 후기는 3탄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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