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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세우스 May 06. 2022

헌혈과의 전쟁



 저는 17년 전에 8시간이 걸리는 큰 수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예정된 수술이었기에 미리 자가헌혈도 했습니다. 일종의 안전장치였던 셈이죠. 그때 처음 수혈의 중요성을 처음 깨닫게 되었습니다.


 ※ 혈액예치식 자가헌혈은 수술 중이나 수술 후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수혈에 대비하여. 수술 전 일정기간 동안에 미리 헌혈을 시행하는 헌혈의 방법을 말합니다.



 그 뒤로 몇 번의 헌혈을 했고 입사 초기에 그동안 았던 헌혈증을 기부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바쁘다 보니 헌혈에 대한 의지가 점점 더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생긴 뒤에는 더욱 여유가 없었죠.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헌혈을 다시 하게 된 계기가 생겼습니다. 바로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검사를 위해 채혈을 하게 되었는데 절대 병원에 안 가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사에 대한 공포가 생각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어르고 달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채혈에 대한 공포를 없애주기 위해 제가 먼저 헌혈을 하게 된 것이죠.


 제가 먼저 해봄으로써 주삿바늘이 그렇게 무섭지 않다고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고서 얼마 뒤 건강검진을 할 때도 채혈하는 모습을 진을 찍기까지 하는 등의  희한한 노력 끝에 아이들을 병원에 데려갈 수 있었습니다.


※ 그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냐 생각하시겠지만 일부 아이들이 보이는 주삿바늘 공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뜻하지 않게 헌혈을 주기적으로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몇 년 전부터 공공기관에 도입된 헌혈 휴가라는 제도 때문입니다. 헌혈을 하면 연 2회에 한해서 하루의 유급휴가를 주는 제도로 도입 초기에는 효용성에 대한 격론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저 역시 회사생활이 16년 차 이기때문에 연차휴가가 모자라서 헌혈 휴가까지 써야 되는 상황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헌혈을 평일에 따로 시간을 내서 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나 사명감은 없었던 상황에서 그 제도는 나름대로 제게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도 헌혈 휴가를 낸다고 하면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휴가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하느냐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죠. 실제로 헌혈 휴가를 내는 분들이 회사 안에서도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제도가 생긴 이후로 저는 꾸준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자랑을 하죠. 헌혈증과 팔에 붙어있는 지혈용 밴드를 보며 좋은 일을 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입니다. 아이들 역시 초창기에는 왜 그렇게 피를 뽑고 오느냐며 저를 되려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위급한 사람을 구하는데 제 피가 사용되었을 테고 생명을 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꾸준히 말을 해주니까 이젠 조금은 알아듣는 눈치입니다.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의 Q&A 발췌


 오늘 아침에 제가 헌혈을 하러 갈 거라고 하니 아이들은 이제 크게 동요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주삿바늘이라면 단어만 들어도 몸에 힘이 빠진다며 기겁을 하던 아이들이 많이 큰 것 같아 대견하기도 합니다.





 평일인데도 헌혈의 집에는 헌혈을 받으러 오신 분들이 계십니다. 사전 문진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서 제일 떨리는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사실 헌혈을 하러 올 때마다 문 앞에서 갈등을 합니다. '그냥 하지 말까?'라고 말이죠. 주삿바늘에 대한 두려움은 그리 쉽게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죠. 헌혈증을 내지 않으면 그냥 연차 처리가 되기 때문에 그냥 발길을 돌려서 간다고 해서 문제 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아이들에게 오늘 헌혈을 할 거라고 말해놓고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또 너무나도 창피한 일입니다. 어른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는 법은 물론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정도의 일을 바늘이 무서워서 못했다고 변명하기에는 창피한 일이기도 했죠.   

 

 그런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는 동안 주삿바늘은 제 몸과 하나가 됩니다. 바늘 꽂는 순간 게임은 끝난 거죠.

구독자들을 배려한 흑백처리


헌혈을 할 수 있는 방식은 전혈, 혈장, 혈소판 등으로 나뉩니다. 제가 오늘 하는 헌혈 방식은 전혈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적십자사를 참고해주세요. 너무 길면 재미없어서 이 정도만 설명하겠습니다. ^^




 이렇게 10여 분 동안의 전혈을 마치고 잠시 쉬는 동안 옆자리를 둘러봅니다. 간호사 선생님이 제게 이번이 열두 번째 헌혈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 줍니다. 열 번이 넘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며 앞으로도 열심히 하리라 생각하려는 순간 바로 옆에서 놀라운 대화가 오고 갑니다.


 간호사님께서 옆자리에 계신 저보다 좀 더 연세가 있어 보이는 여성분께

"ㅇㅇㅇ님, 이번이 39번째 헌혈이시고요."라고 말하시는 것을 듣고 맙니다.


 저는 겨우 열두 번 한 걸로 글까지 쓰고 있는데 소리 없이 강한 선배님을 보니 마음속에서 존경스러움이 샘솟습니다.

 그리고 저같이 제도를 만드니까 겨우 헌혈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것도 없이 묵묵히 해오신 헌혈의 대가들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헌혈을 마치면 주는 사은품, 음료수, 과자


 헌혈을 마치면 10분 정도는 무조건 쉬고 가도록 합니다. 물이나 음료를 충분히 마시고 과자를 먹고 기운을 차리게끔 하기 위해서죠. 조용히 다른 분들과 초코파이를 한 봉지 뜯으며 회복시간을 가져봅니다. 한편으로는 감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헌혈의 집이 있기에 이동하는데 큰 무리가 없지만 다른 지역 같은 경우에는 헌혈을 하고 싶어도 헌혈의 집이 부족해서 쉽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요.


http://m.joongdo.co.kr/view.php?key=20180612010004587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헌혈을 하고 싶어도 못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으니까요. 오전에 헌혈을 하고 오후에는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서 3시간을 풀로 잤네요. 오늘은 확실히 헌혈휴가 없었으면 헌혈 못했을 뻔했습니다.


#헌혈 #헌혈의집 #피가모자라 #대한적십자사 #전혈 #헌혈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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