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필명과 대부분의 닉네임이 페르세우스인 것을 보고 이미 짐작하신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저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지금 필사로 8개월 넘게 붙잡고 있는 <일리아스> 역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저의 사랑을 확인하고 부족한 이해도를 넓히기 위한 일환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페르세우스라는 이름을 쓰게 된 데에는 재미난 사연이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열심히 읽던 2000년 초반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때는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이 우리의 일상 속으로 본격적으로 스며들던 시절이었습니다.
수많은 웹사이트들이 생겼고 사이트를 가입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유한 아이디와 닉네임을 정해야만 했습니다. 이 몇 글자 안 되는 단어가 우리 인생을 평생 따라다닐 것이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채 말이죠.
왜 나는 이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마 그 시절에 만든 아이디나 닉네임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바꿀 때를 놓쳐서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사용하시는 분들 꽤 많으실 것으로 짐작됩니다.
저 역시 그때 ID를 제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해 사용하기 시작했고 뒤늦게 큰 후회를 했지만 되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고민도 없이 너무 많은 사이트에 그 ID를 사용했기 때문이었죠.
짧고 굵은 후회를 뒤로 한채 닉네임이라도 제대로 된 것을 만들자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창의력과 유머 감각이 그리 뛰어나지 못했던 저는 기껏 생각했던 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물들이었습니다. 후보는 많았지만 나중에 다시 후회하지 않기 위해 깊은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우라노스 : 아들에게 성기가 잘리는 신이라..
제우스 : 신들의 왕은 좀 부담스러운데..
포세이돈 : 수영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하데스 : 너무 우울하고 칙칙한 이미지잖아.
아레스 : 이 신은 너무 무식하고 폭력적인 이미지야.
아테네 : 그래도 여자 신을 남자 닉네임으로 쓰기에는..
아폴론 : 옛날 불량식품 이름이랑 똑같아서 패스.
헤라클레스 : 너무 우락부락하고 힘만 센 이미지잖어.
오르페우스 : 음악이랑 나랑 잘 안 어울리고 별로 안 유명해.
헤르메스 : 상업과 전령의 신이라는데 딱히 폼이 안 나네.
아이올로스 : 바람의 신인데 인지도가 약하네..
아킬레우스 : 너무 식상해. 약점이라는 이미지도 별로고.
헥토르 : 트로이 전쟁에서 잔인하게 죽잖아
징글징글하시죠? 진짜 고민을 많이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결국 기나긴 고민 끝에 입에도 잘 붙고 신화 속 이야기도 재미있는 인물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니 그가 바로 페르세우스입니다.
그는 천둥의 신이자 주신인 제우스와 인간인 다나에의 아들이며 아이기스라는 최고의 방패를 가지고 날개 달린 말인 페가수스를 타고서 눈을 마주치면 상대방을 돌로 만드는 메두사를 해치운 유명한 서사시 속의 뛰어난 영웅이죠.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피렌체
페르세우스는 실제로 이탈리아 피렌체에 동상도 만들어져 있고 영화로도 꽤 많이 제작되었으며 심지어 별자리까지 있으니 사람들이 기억하기에도 좋았고 부담스러운 불멸의 신이 아니라 반신반인의 존재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인공 외모가 좀 내 취향이 아닌데..
당연히 처음 제가 이 닉네임을 선택했을 때는 꽤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위 지인들에게 닉네임이 언급될 때마다 놀림을 받고는 했죠. 제가 가진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나 뭐라나. 그럴 때마다 지금이라도 바꿔야 하나 하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순간들을 귀차니즘 덕분에 몇 번 극복하고 나니 어느새 20여 년을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그동안 해왔던 게임 속에서 닉네임으로하도 사용했더니 이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연스럽게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도 이런 제 깊디깊은 사연을 알려주면서 꼭 한 가지 교훈만은 함께 일러주려 합니다.
"얘들아, 너희가 아이디와 닉네임을 만들게 된다면 자식 이름을 짓듯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서 지으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