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르는 놈 따로, 치우는 분 따로", 스트레스, 답답함, 잔소리, 쓰레기장, 돼지우리처럼 부정적인 의미가 떠오를 수도 있고
취미생활, 후련함, 개운함, 청결처럼 긍정적인 의미를 떠올리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보통 정리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구체적인 장소나 대상을 떠올립니다. 거실, 안방 서랍장, 주방, 베란다, 내 컴퓨터 같이 말이죠.
며칠 전 뜻하지 않게 출입문 앞의 붙박이장을 싸악 들어내서 치우는 대형 행사를 치렀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쓸 수 있는 칫솔이 하나도 없다!"
이 붙박이장에 주로 넣어두는 물건 중 하나인 칫솔을 찾아내기 위해 시작된 짧은 여정은 순식간에 폭발적인 연쇄효과를 낳았습니다.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만에 대대적인 정리로 불이 붙은 것입니다.
이 사진만 보시면 '평소 이 정도면 꽤 관리가 잘되는 수준의 붙박이장 아냐?' 하고 오해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사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안에 있는 것들을 상당히 비워낸 상태의 사진이죠.
빈 공간에 남아있던 내용물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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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사진이 아닌 실제 사진
말을
잇지
못하는
이라는 신조어가 절로 나오는 상황입니다.
지금 와서 얘기지만 사실 원래 이 정리의 시작한 사람은 아내였습니다. 칫솔을 찾는 것에서 끝날 줄 알았던 간단한 활동은 빠르게 붙박이장과의 전쟁으로 변하고 만 것이죠. 저는 그때 거실에서 유유자적하게 그날의 브런치 원고를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점점 투덜거리는 목소리의 데시벨과 빈도가 높아지는 것을 감지한 저는 빛의 속도로 전장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배우자가 있는 분들은 격하게 공감하시리라 생각되지만
시켜서 하는 것과
알아서 하는 것은
똑같은 일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평가가 달라집니다.
저는 이미 알아서 하는 시기를 넘기고 시켜서 하는 직전의 상황까지 가고 있다는 것을 생존본능으로 느꼈던 것이죠. 그 데드라인을 넘기는 것은 가정의 평화에 일절 도움이 되지 않기에 신속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스캔하기 시작했습니다.
업무는 이원화되었고 아내는 붙박이장 정리, 저는 간단한 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바로 봉투 정리였죠. 언젠가 꼭 정리수납전문가 자격증을 따겠다는 꿈이 있는 제게는 이 정도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Before
제 소중한 등짝 보호를 위해 하던 일을 중간에 끊고 원치 않는 시점에 투입되었지만 이런 정리는 언제나 신나는(?) 일이죠. 묵은 때를 씻어내는 느낌이랄까요?
After
드디어 30여 분만에 모든 정리가 끝났습니다. 아내는 붙박이장 정리, 저는 봉투 정리 및 쓰레기 처리를 마무리하고 손을 털었죠.
물론 정리의 후유증은 있었기에 그날 오후에 요양을 취해야만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칫솔을 네 개나 찾았다는 것이죠. 없는 줄 알고 새로 사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어딘가에 또 물건들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니 언제 한 번 날을 잡아 다른 수납장들을 뒤져보면서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정리를 한지 일주일 정도만에 붙박이장의 상태는 거의 정리를 하기 전의 수준으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그걸 보며 정리를 힘들게 괜히 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이렇게 정리를 하면서 필요 없는 물건도 버리고 찾기도 하는데 정리를 하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정리를 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충분한 교육도 될 테니까요. 정리를 하는 방법을 굳이 따로 시간을 내서 가르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