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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태풍과의 전쟁

잠시 좋은 꿈을 꾸었구나!!

by 페르세우스


기러기의 꿈


-인순이 아님-


난~ 난 계획이 있었죠

가족들이 떠나 심심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계획

(중략하고 클라이맥스로 바로 이동)


난~~ 난 계획이 있어요~

그 계획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있는 태풍이란 벽 앞

당당히 이겨낼 수 있어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으실 텐데요. 저의 아쉬운 마음을 담아 거위의 꿈을 개사해봤습니다. 사실 오늘부터 저는 3박 4일간의 단기 기러기 아빠가 될 계획이었습니다.


대략적인 상황은 이렇습니다. 처제네가 장모님과 함께 일주일 동안 제주도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의 일정이었는데 처제가 아내에게 제안을 해온 것이죠. 숙소가 꽤 넓은 편이니 다만 며칠 간이라도 저희 가족들이 제주도에 놀러 오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떠나요~ 셋이서 모든 것을 훌훌 던지고



제주도를 좋아하기도 하는 데다가 숙소에 수영장도 있다고 하니 아이들은 헤엄이라도 쳐서 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쳐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회사를 이틀씩 쉬기가 여의치 않을 수도 있다고 즉답을 피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마음을 정했는지 자신은 휴가를 낼 수 있다며 혼자서라도 데리고 다녀오겠다고 합니다. 그것까지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사안은 아니었기에 뜻이 정 그렇다면 그리하라고 답을 주었죠.




일정은 9월 1일(목)부터 4일(일)까지 3박 4일이었습니다. 여행이 결정된 지난주부터 저는 틈틈이 '뭘 하고 놀지?'라는 생각을 수시로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박 4일의 기간 동안 제가 잡은 약속은 단 두 개뿐이었습니다. 저도 이제 한물간 모양입니다. 그나마 그 두 개중 하나마저 친구의 사정으로 인해 다시 일정을 조율하기로 한 상태였죠.


그런 와중에 어제 오후부터 불안한 기운이 온라인에서 모락모락 나타나기 시작했죠. 키워드는 바로 '초대형 태풍'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회사 업무의 특성상 태풍이란 단어 자체가 워낙 민감하다 보니 조만간 비상근무를 서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겠다는 정도의 생각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태풍에 대한 기사가 늘어나더니 급기야 힌남노와 제주도가 조합된 기사 제목들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위기감을 느낀 아내가 가도 괜찮겠냐고 묻자 저는 저녁에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고 말했습니다.

어젯밤부터 네 명의 가족이 밤 9시 반부터 현 사태를 매우 엄중하게 보고 상황에 대한 회의를 하며 제주도 여행을 갈지 말지에 대한 격론을 벌였습니다.


아이들은 이게 무슨 브런치를 오밤중에 먹는 소리냐며 입이 코까지 튀어나올 기세지만 만약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는 것으로 3박 4일의 제주도 여행은 무산되었습니다. 한 건당 만원의 수수료까지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더욱 속이 쓰린 느낌이 듭니다. 네 가족은 모두 각자 다른 이유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했죠.




난생처음 보는 태풍의 해괴한 경로가 참으로 야속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먼 태평양 쪽에서 기고

편서풍을 거슬러 왼쪽으로 향해 오면서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듯 갑작스럽게 경로를 바꾸는 태풍이라니..




이 상황은 마치 '너의 꿀 같은 자유시간을 결코 허하지 않겠노라'는 신의 뜻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우리들의 제주 여행을 허하지 않겠노라는 뜻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요.



어쨌든 저의 3박 4일간의 머릿속에서만 열심히 짜고 있던 계획표는 일장춘몽처럼 날아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 집에 남아 여행지에 있는 가족들에 대해 괜스레 마음 쓰이는 일이 생기지 않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그리고 원대한 계획도 없었기에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습니다. 딱히 일정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면 널브러져 있다가 밀렸던 글이나 좀 쓰려고 했으니까요.



결국 글 초반부에 개사를 해서 적어둔 저의 짧았던 기러기의 꿈은 태풍이라는 벽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건 절대 설상가상이 아님을 다시 한번 밝히는 바입니다. 특히 유부남 이웃분들의 심심한 위로는 받지 않겠습니다.

sticker sticker


저는 결코 상심하지 않았으니까요!! ㅜㅜ



※ 아무쪼록 이번 태풍으로 인해 큰 피해가 생기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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