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집 냉장고로 말씀드리자면 2009년 4월에 혼수로 들어온 친구였습니다. 올해로 14살이죠. 매장에 전시된 제품으로 할인을 받아서 구매를 했고 그때부터 함께 생활해왔습니다.
못해도 다섯 번은 넘는 잔고장과 더불어 이사도 세 번이나 함께한 우리 집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며 전우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멀쩡한 냉장고
그랬던 친구가 작년부터 부쩍 골골대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얼음 넣는 플라스틱 통이 깨지는가 하면
냉장고 문을 열면 불이 켜지는 LED 등은 마치 나이트클럽의 사이키 조명처럼 번쩍번쩍 거리며 눈 건강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모터나 팬에 먼지가 끼어서 인지 기괴한 소음이 수시로 나기 시작한 것이죠. 전등이 고장 난 것이야 잠시만 참으면 될 일이지만 지속적인 소음은 생각보다 커서 밤 시간 대에는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데 꽤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냉장고를 잡고 이리저리 좁은 틈 사이로 이리저리 흔드는 방식으로 임시조치를 하곤 했죠. 그게 또 먹힙니다.
전자제품들이 고장 나면 일단 때리면 된다는 구석기시대의 해결책을 실제로도 활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냉장실이 좁은 것도 문제여서 아무리 열심히 정리를 해도 티가 잘나지 않았습니다.물론 실력 있는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처럼 평소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제 탓이 크지만요.
정리를 해도 티가 나지 않는 냉장고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 냉장고를 14년 썼다고 하면 저희 본가 어른들부터 시작해서'우리 집은 그것보다 더 오래 썼다'는 반응이 대부분입니다. 나이 앞에서 장사 없지만 이제 헤어질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3월에 아내가대형마트에서나오는 길에 저를 잡아세웠습니다. 아내의 눈길을 사로잡는 녀석은 바로 정수기가 달린 냉장고였습니다. 아내는 제게이제는 때가 되었음을 강한 눈빛으로 표현했고 저는 덤덤하게 대답했습니다.
"응, 참고할게. 일단 집에 가자."
3월에 찍었던 사진
사실 저는 물건을 사는 것에 대한 욕심은 책 말고는 거의 없었기에 다른 물건을 살 때 늘 보수적으로 판단하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런 제 성격을 평소에는 대부분 존중해주던 아내가 이번에는 완강한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몇 시간 동안 의견교환을 한 끝에 다음번에 사자라는 결론을 내렸죠. 제가 이겼다는 소립니다.
그러고서 6개월이 지난 뒤 9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또 똑같은 마트를 지나가면서 진열해놓은 냉장고를 발견하게 되었고 꽤 할인이 되어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아내는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흘려들었고 제가 이겼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환경 타령을 그렇게 하는 사람이 플라스틱 통에 든 생수를 사 먹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아내의 말도 일리가 있었고 솔직히 냉장고가 지금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태였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곰곰이 하루 동안 생각을 하다가 다음 날 저녁이 되자 저는 아내에게 듣지도 보지도 못한 희한한 제안을 했습니다.
"그렇게 갖고 싶으면 사러 가자. 그런데 대신 진열해두었던 그 제품이 그 사이에 팔렸으면 그냥 돌아오는 걸로 하자"라고 말이죠.
이건 사자는 건지 사지 말자는 건지 헷갈리지만 아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속도로 외출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차로 가기 귀찮으니까 그냥 버스를 타고 가자"라고 또 제가 말합니다. 그냥 저는 운전하기가 싫어서 그렇게 말을 한 건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조금이라도 매장 도착시간을 늦추기 위한 속 보이는 X수작 같이 느껴지네요. ^^;;
매장에 도착하니 그 냉장고는 마치 우리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위풍당당하게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매장에 들어가 직원과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이번에 우리가 사려고 마음먹었던 냉장고가 3월에 아내가 제게 사자고 사진을 찍어두었던 냉장고였다는 것입니다.
그때보다 가격도 많이 할인되어 있네요.
저도 놀랐지만 직원은 소스라칠 정도로 놀랍니다. 보통 집이라는 것이 각자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소리들을 하지만 냉장고가 그렇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으니까요. 예전에 자신이 찍어놓은 사진을 들이밀며 할인을 더 해줘야 한다는 아내의 파상공세에 직원이 땀을 뻘뻘 흘립니다.
결국 그렇게 매장 앞에진열되어 있었던 냉장고는 우리 집으로 입양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냉장고 같은 살림살이가 새로 들어오는 것은 새 식구를 맞는 수준의 대청소가 수반되어야 했습니다.
꺼내놓으니 어지러워 보이는 냉장고 안 음식들
일단 냉장고를 비워야 했으니까요. 엄청난 시간과 노동이 소모됨을 느꼈습니다. 정리를 마친 뒤 기사님들이 도착하셨고 기존 냉장고를 분리해서 가지고 나가기 시작하십니다.다른 가전들보다 제 정성과 손때가 묻어 있어서인지 기분이 이상합니다.
안녕~~~!!
그동안 저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해와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생각도 잠시뿐 헌 냉장고가 나간 자리를 보니 아주 가관입니다. 청소기와 걸레로 후다닥 치우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헌 냉장고는 결국 떠나고 드디어 새 냉장고가 왔습니다. 한 시간 반이 걸렸네요. 들어오는 길이 좁아 분리하고 붙이고 기사님들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 뒤부터는 다시 냉장고에 음식들을 채우는데 결국 정신이 없었네요.
처음에 꺼내 둘 때 다른 냉동실 음식들과 달리 제대로 보관해두지 못한 아이스크림 님들은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시고 말았네요.
내 소중한 녹차 아이스크림들..
사기 전까지는 고민도 많았고 정리하느라 고생도 많았지만 이왕 새 식구가 이렇게 들어왔으니 잘 정리하면서 잘 지내보려 합니다.
드디어 정리 끝!!
새 냉장고야, 앞으로 잘 부탁해. 앞으로 우리 집에서 20년 정도는 함께 살자...
한 줄 요약 : 결국은 주인이 정해져 있는 물건들이 진짜 있는 모양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