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난 후

슬기로운 학부모 생활

by 페르세우스



나름 대형 프로젝트라고 여겼던 학예회를 며칠 전에 잘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대형 프로젝트가 또다시 찾아왔습니다. 바로 연극입니다.


5학년 2학기 국어에서는 연극이라는 단원을 배웁니다. 아시다시피 연극을 배우는 건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아이들이 연극을 직접 기획해서 해본다는 것이었죠.

출처 : https://calcproject.tistory.com/851



아이들의 담임선생님은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 주려는 의욕과 열정이 넘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연극을 역사와 연결시켜서 임진왜란 때의 장면을 모둠(조) 별로 나누어하자고 제안하셨기 때문이었죠. 덕분에 아이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절대 까먹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각자의 대본과 롤(역할)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저는 마냥 즐거웠습니다. 아이들이 무대 위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며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은 부모로서 흐뭇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연극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단 각 모둠끼리 소품까지 준비해서 짧은 연극이지만 제대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죠. 두 아이는 각자 장면과 역할을 맡았는데


1호의 모둠은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피란을 가려는데 서애 류성룡이 만류하는 장면 + 백성들의 대화(4인)로 구성된 부분을 하기로 되었습니다. 뽑기로 맡아온 배역은 바로 선조였습니다.




2호의 모둠은 진주대첩(진주성 1차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이 부하 장수와 대화하며 왜군을 무찌르는 장면(5인)입니다. 뽑아온 역할은 김시민 장군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대본을 일단은 외우는 것부터 하라고 합니다. 외운 뒤부터 제가 아이들의 상대 배역을 맡아서 읽어주는데 제 기준에서 듣기에는 이들이 읽는 말투가 영 재미가 없습니다.


당연히 아이들이 연기를 해봤을 리도 만무하고 대사 자체도 어른 말투라서 어색한 데다 사극 대사를 들어봤다고 해봐야 얼마나 들어봤겠습니까..


이럴 때 사극 말투 전문가인 제가 나서야겠지요. 아이들에게 대본에다가 말의 높낮이 악센트까지 열심히 적어주면서 자기 전에 함께 연습을 했습니다. 연습 초반에는 계속 딱딱하고 재미없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목이 쉬어라 열연을 선보이며 시범을 보입니다.


제가 서애 류성룡의 역할에 과몰입하면서 즈으으으으언하~~!!! 한양을 버리시는 것은 아니 되옵니다!!!라고 피를 토하는 듯한 느낌으로 이 나라 종묘사직을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혼신의 힘을 다해 대사를 치자 아내는 옆에서 '끌끌끌'하며 혀를 차면서 쳐다봅니다. 나이 먹고 애보다 더 신나게 노는 모습이 한심해 보이나 봅니다. ㅎㅎ

선조를 앞에 앉혀놓고 간곡하게 한양을 지키길 권하는 트레이닝 복 입은 류성룡




지난번에 신청을 해놓고 면접까지 봤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관계로 취소해버린 연극수업에 끝까지 도전해볼 걸 그랬나 봅니다. 물론 그냥 해보는 소리입니다.



연기는 이렇게 준비하면 되었고 소품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저는 평소에 아이 숙제가 부모 숙제로 되는 것을 매우 경계합니다. 그런데 막상 임금 역할을 하는 아이의 소품을 살펴보니 아이 스스로 준비하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상황입니다. 일단 임금의 겉옷인 곤룡포, 임금의 족두리인 익선관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빌리는 것을 알아보다가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만들 수 있는 익선관과 티셔츠 형식의 용포가 있었던 것이죠.




빌린다고 해도 이동시간과 비용까지 고려했을 때 굉장히 싸게 잘 구한 것 같아서 뿌듯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아내가 갑작스럽게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1호가 연기할 때 소품으로 붙이겠다며 열심히 준비를 하더니 출력을 해왔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지만 아이도 꽤 만족스러워합니다.

엄마표 일월오봉도(A3 ×16EA)



만들고서 일일이 테이프로 붙이고 나니까 '나중에는 네게 방법을 전수해 줄 테니 네가 직접 하려무나~'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함께 준비한 연극은 큰 탈 없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학부모를 초대했던 학예회와는 달리 아이들끼리만 하는 행사다 보니 직접 볼 수는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제 사극 연기지도의 성과를 직접 확인했어야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준비했던 연극을 잘 마친 뒤 선생님께 목소리도 크고 연기가 좋았고 준비도 잘해왔다며 칭찬을 받아왔다고 하니 그걸로 만족하려 합니다.


한 줄 요약 : 뭐든지 꾸준히 연습하면 분명 나아진다. 그렇지 않았다면 연습이 부족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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