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경쟁사회입니다. 싸움에서 이긴 자만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 구조였죠. 이런 커다란 틀 안에서 역사는 발전과 퇴보를 거듭해 지금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 동안 총과 칼 한 자루도 없지만 가장 치열하면서도 위험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사적인 싸움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토론입니다. 신체적인 능력으로 충돌을 감수하고 하는 경쟁하는 스포츠와는 달리 오직 하나의 주제를 놓고 말 하나로만 다투어 승패를 가를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 말을 조리 있게 하고 싶은 욕구가 큰 편이며 토론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위인들 중 한 분이 바로 서희 장군입니다. 고려시대 거란과의 1차 전쟁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건 담판으로 고려를 위기에서 구했을 뿐만 아니라 되려 영토까지 확장시킨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이죠. 말을 잘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경쟁력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준 분이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남을 설득할 수 있는 토론능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활동 중 하나입니다.토론능력을 키운다면 시의적절하고 정확한 의사 전달 능력을 키울 수 있으며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이고 합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펼침으로써 상대를 설득하는 법도 배울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반박에 대응하고 논리의 허점을 파고드는 훈련도 되므로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판단하고 말하는 습관 또한 키울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런 토론을 배울 기회는 예전에는 많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요즘에는 부모님들이 토론에 대한 관심을 가지며 대화에도 신경을 쓰고 토론 수업을 하는 사교육이 생겨나는 등 관심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공교육에서도 토론의 중요성이 강화되었습니다.
아이들의 국어시간에도 토론과 관련된 주제로 수업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먼 옛날에는 '토론은 이런 것이다'라는 정의나 방식 정도만 짚고 넘어갔겠지만 요즘은 아닙니다. 실제로 팀을 나눠서 토론을 한다더군요. 게다가 방식은 간단한 체험도 아닌 토너먼트 방식의 토론배틀이었습니다. 초대형 프로젝트의 스케일을 보고 있자니 담임선생님의 스파르타식 교육에 놀라울 지경입니다.
첫 번째로 먼저 아이들에게 각자 하나씩 직접 주제를 내라고 한 뒤 그중에서 투표로 하나를 정합니다. 20개가 넘는 의견이 나왔고 주제는
'과연 여자도 군대에 가야 하는가?'
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선생님께서는 각자 자신만의 찬성 의견과 반대의견을 근거와 함께 찾아보라는 숙제를 아이들에게 내주셨습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온라인상으로 자신만의 논리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고 둥이들도 낑낑대면서 찾아서 등록을 했죠. 인터넷을 바다를 헤매면서 말이죠.
요즘 초등학생들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각자 아이들 나름대로의 조사를 마치고 찬반 자료를 순서대로 정리를 해놓으니 이제 수업에서는 본격적인 토론배틀 체제로 들어갑니다. 반의 27명 아이들 중 세 명의 사회자를 추첨으로 뽑고 나머지 24명은 3인 1조로 총 8개 팀으로 나눕니다. 공교롭게도 1호가 사회자로 뽑히고 2호는 2조에 속하게 되었죠.
대충 뭐 이런 대진표입니다.
대진표에 나타난 그대로 단판 토너먼트 방식으로 토론배틀을 진행합니다. 토론의 방식은 간단했습니다.1팀과 3팀이 경기를 한다면
1. 자신의 팀이 찬성과 반대 입장 중에 무엇을 할지를 추첨으로 정한다.
2.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찬성팀이 주장 제시, 반대팀이 주장을 제시한다.
3. 찬성팀의 주장에 대해 반대팀의 반론을 제시하면 찬성팀은 그 반론에 대해 근거를 대서 반박
4. 반대팀의 주장에 대해 3번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
5. 토론이 끝나면 사회자와 참석자를 제외한 18명의 학생들의 투표를 통해서 승리팀이 다음 라운드에 진출
대충 이런 방식이라고 합니다.
2호가 팀과 팀원이 드디어 정해졌다며 돌아와서 이야기해주길래 그때부터 특훈(?)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성이 군대에 가야 하느냐에 대한 개인적인 주장과는 별개로 이 토론 배틀에는 모든 주장에 논리를 다 갖춰야 하기에 꽤 많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2호가 준비한 자료에다가 상대팀의 친구들이 올려놓은 주장까지 정리해서 거기에 대한 반론과 반박자료들을 함께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다 해주는 것은 아이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기에 최대한 말로 설명하려니 죽을 맛입니다.
2호가 일주일 동안 흘린 땀과 노력의 흔적
그렇게 밤에 11시까지 남자 둘이서 방에서 낑낑대고 있으니 2호 입장에서는 계속 사회자가 된 1호를 부러워하며 볼멘소리를 합니다. 처음에는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경험인지에 대해서 설득을 합니다. 하지만 격려도 잠시뿐 힘들다고 징징거리길래 그러면 대충 이 정도만 하자고 말했더니 또 그건 싫다고 하네요.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할지 혼란스럽지만 저도 힘든데 아이는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잘 달래줍니다.
정리된 내용을 아이가 숙지할 수 있도록 문구를 다듬고 연습을 시켜봅니다. 그렇게 사흘 정도를 함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결과 기본적인 논리구조가 갖춰진 나름의 기본 대본까지는 함께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이 대본대로 절대로 토론이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최소한의 역할은 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가 코로나를 앓기 바로 직전이어서 컨디션도 굉장히 안 좋았는데 저도 참 징글징글합니다.
그리고 토론하는 날 아침에는 아이에게 중요한 팁도 몇 가지 추가로 알려줬습니다.
ㅇ 최대한 흥분하지 말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라
ㅇ 중간에 상대방의 말을 끊지 마라
ㅇ 대답을 시작할 때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같은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표현을 써라
ㅇ 말을 할 때 대본만 보지 말고 상대방이나 사회자, 청중도 자연스럽게 쳐다봐라
등등을 말이죠.
그렇게 2호는 이틀에 나눠서 진행되는 토론배틀을 위해 등교를 했고 저는 코로나 격리가 결정된 수요일 저녁에서야 최종 결과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2호에게 도움을 준 건 우승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굳은 믿음이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런 소중한 기회가 있을 때 토론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라도 제대로 경험을 시켜보고자 한 의도가 가장 컸습니다. 솔직히 1회전만 통과해도 대견하다고 아낌없이 칭찬을 해줄 요량이었죠. 행여나 1회전을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노력한 시간이 있기에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혼자 안방에서 격리가 되어있는 제게 2호가 전화가 왔습니다. 토론 배틀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말이죠. 그런데 이 녀석이 뜸을 들이는 법을 어디서 이렇게 제대로 배웠는지 듣는 사람 애가 타게 바로 알려주지 않고 야금야금 사람을 긴장되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도 모르게 아이의 말에 빠져들어서 결과를 계속 듣고 있었는데 토론 배틀에서 2호의 팀은 8강을 넘어준 것도 모자라 준결승도 넘어 우승까지 차지했다고 합니다.
8강전에서는 12:6
4강전에서는 14:4
결승전에서는 13:5
의 결과로 말이죠.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낸 것이 아니라 같은 팀을 했던 친구 하나가 또 큰 역할을 많이 해줬다고 말해주네요. 혼자 잘했다고 잘난 척하지 않아서 칭찬을 해줬습니다. 그리고 떨어진 다른 팀의 친구에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아쉽겠다고 그래도 엄청 잘하더라고 칭찬과 위로를 해줬다는 말을 듣고는 더 큰 칭찬을 해줬네요.
본래의 목적이었던 토론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된 점도 잘된 일인데 거기에 겸손함도 배우고 배려나 공감능력도 배웠다니 참 고마운 일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아이를 직접 안아주면서 축하를 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네요.
정치인의 경우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언제나 말은 언제나 설화(舌禍)를 낳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이유로 웅변은 은(銀)이요, 침묵은 금(金)이라는 말도 생겼을 겁니다. 그래도 필요할 때와 장소에서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아이들의 앞으로의 인생에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설득해나가는 과정의 연속이니까요.
이번 토론 수업이 제가 평소 집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해주고 아이를 많이 성장시킨 것 같아서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저도 다른 이웃 작가님처럼 토론 전문가가 아니라서 준비를 도와주면서 이래저래 무리를 하긴 했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한 줄 요약 : 아빠는 너희가 언젠가 아빠와의 말싸움(토론)에서 이기는 날을 고대하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