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에 내려가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의미 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할머니의 의뢰로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설득해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사연인즉슨 이렇습니다.
아버지께서 당 수치가 높은 관계로 평소 꾸준히 관리를 하셔야 하는데 식습관의 실천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수시로 챙기고 쓴소리를 하시는데 아시다시피 그 나이대의 어르신들이 부인의 말을 잘 들으면 오히려 이상하겠죠? 잔소리를 하다 하다 지친 어머니께서 이번에는 아이들을 이용해서 아버지를 설득해 보기로 마음을 먹으신 겁니다.
어머니께서 아이들을 앉혀놓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미리 교육을 시킵니다.
"할아버지께서 나중에 둥이들이 결혼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그러려면 건강하셔야 되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이 할아버지께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드시지 말라고 이야기하면 효과가 있을 것 같아"라고 말씀하신 거죠.
아내인 엄마가 말씀드려도 듣는 둥 마는 둥 하시고 아들인 제가 말씀드려도 활동량이 많고 약도 잘 드시고 있다며 크게 개의치 않으시니 마지막 최후의 보루인 손자들이 투입된 겁니다.
씻고 옷도 갈아입고 잘 준비를 모두 마친 상황에서 어머니와 저는 아이들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낸 뒤 할아버지가 주무시는 방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할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라고 운을 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협공이 사전에 조율된 대로 순조롭게 이어졌지만 즉각적인 소득은 얻지 못한 채 금세 마무리 되었습니다. 알겠다고 하시며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넘어가신 거죠. 할아버지가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하는데 아이들 입장에서 뭘 더 할 수가 있겠나 싶었을 겁니다. 녹취를 할 수도 없고 각서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평생 한 고집하면서 살아오신 분이라서 아이들의 투입이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기대를 크게 하지 않았지만 온 가족이 할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한다는 걸 알려주는 정도의 효과는 얻었으니 시간낭비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할배도 할 말이 많으셨던지 인생 조언이라는 명목 하에 아이들에게 바라는 점등 여러 주제로 열심히 이야기를 하십니다. 짧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일장 연설을 들은 뒤 아이들은 앉은 김에 평소 궁금했던 이야기를 물어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아빠를 키울 때 이야기를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간식이 없으면 뭔가 서운한데 때마침 출출하다던 2호의 말에 삶은 계란과 사과를 가져와 함께 먹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학창 시절 저와 동생이 열심히 했던 게임기를 숨겨두었던 이야기, 저를 키울 때 월급의 1/3 가까이 되는 값의 보약을 지어서 먹였다는 이야기, 학교를 가기 싫어서 지붕에 몰래 숨어있던 이야기까지 말이죠. 듣다 보니 처음 듣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저도 어린 시절 부모님께 사랑과 관심을 참 많이 받고 자랐다는 점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아빠가 사랑받고 자랐기에 자신들도 사랑받고 자란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겁니다. 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대화여서 아이들이 금세 졸려했지만 여러모로 의미 있었던 대화였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