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 4와 범죄도시 3가 거의 동시에 문을 두드리고 있기 때문이죠. 게임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디아블로 4를 외면하기가 쉽지 않고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범죄도시 3을 언제 볼 건지 예매일정을 확인하고 계실 겁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게임도 좋아하고 액션영화도 좋아하지만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저는 어제 오후에 재미있는 모임에 다녀온 것이죠. 현재 가입되어 있는 방탈출 동호회의 번개가 있어 급히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평소 방탈출 카페에 대한 궁금증과 목마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위에 함께 할 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카페를 가입했고 거기에서 평일에 방탈출을 하는 동호회가 또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서 찾게 된 동호회의 번개였던 거죠.
방탈출카페 카페
평소에 단톡방에서 수시로 시간과 장소를 정해 방탈출 파티를 운영해 나가는 방식이다 보니 눈이 휙휙 돌아가며 읽기에 바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무서운 방탈출 테마가 많다 보니 쉽게 함께 하겠다며 손을 들기도 힘들었죠. 제가 지난번에 갈지 말지 고민하다가 하마터면 갈 뻔한 테마제목 중 하나도 <링>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우물에서 나와서 tv 밖으로귀신이 나오는 그 링입니다.
링의 공포도는 별이 다섯 개!!
생각보다 방탈출 카페가 공포테마의 비율이 높다는 것을 알고 진지하게 고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링도 생각보다 많이 무서운 편이 아니라는 이야기에 더 부담감이 느껴졌죠. 저는 생각보다 겁이 많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던 겁니다. 저는 아래의 기준으로 따지면 쫄에 가깝더라고요.
그렇다고 이렇게 어렵게 찾아온 동호회를 그냥 나가는 것도 아쉬운 일입니다.
그러던 차에 방탈출 카페를 가기 위한 파티가 아닌 순수한 번개 일정이 잡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니 여기에 계신 분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오시는 분들은 저 포함해서는 10명이었습니다. 동호회의 인원은 전국 단위로 43명인 것을 감안하고 서울에서 급하게 잡은 모임치고는 많이 모인 셈이죠. 오랜만에 신촌을 향하는 지하철을 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번개에는 좀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보통 번개라면 일반 식당이나 술집에서 하는데 그런 곳이 아닌 파티룸을 대여해서 그곳에서 열린다는 점입니다.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겠다 싶었죠.
파티룸에 도착해서 처음 보는 분들과 인사를 나눴습니다. 초면의 뻘쭘함도 잠시일 뿐 오자마자 보드게임부터 달립니다. 방탈출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건 인지상정인 모양입니다.
텍사스 홀덤도 해보고 라비린스라는 게임도 해봅니다. 아이들과 가끔 했던 우노도 했는데 아이와 하는 게임과는 차원이 정말 다르네요. 정말 치열합니다.
이걸로 끝나면 시시하겠죠? 다음에 이어지는 프로그램은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바로 tvN의 인기프로그램인 <놀라운 토요일>에서 하는 도레미마켓이라는 코너를 아예 여기서 실제로 해버립니다.
말 그대로 노래를 일부 구간만 틀어주고 그 대목만 들은 뒤 가사를 맞추는 방식의 게임입니다. 첫 번째 노래는 세븐틴의 <손오공>이었고 두 번째 노래는 서태지의 <인터넷 전쟁>이었는데 저는 아주 폭삭 망했습니다.
들리지가 않습니다. 노화가 오면 귀도 함께 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다행히 귀가 밝고 감각이 좋은 분들이 많아서 아름답게 막을 내렸습니다.
그 이후에는 초성퀴즈였는데 이 프로그램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바로 초성만 보고 방탈출 카페 테마의 '이름'과 매장의 이름을 맞추는 방식이었는데요.
예를 들어서 ㄷㅎㄴㄹㅅㅂㄷ 라고 한다면
동화나라수비대 라는 테마명과
넥스트에디션 건대2호점이라는 매장명까지 정확히 맞춰야 정답으로 인정되는 겁니다.
저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퀴즈가 가능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왜냐하면 전국에 방탈출 카페에 있는 테마개수는 인터넷으로 검색된 내용만 보더라도 1,932개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계속 "이 사람들 대체 뭐지?"라는 생각을 하며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저는 방탈출 카페를 그동안 다섯 번밖에 못 간 완전 초짜여서였죠. 하지만 5분 만에 저는 완벽한 구경꾼 입장에서 신기하게 입을 벌리고 열정적으로 문제를 푸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 의문은 나중에 물어보고서야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방탈출 카페를 가본 횟수가 적은 분이 100방(방탈출 테마 경험의 단위) 정도였고 모임장님은 무려 1,400방이나 된다는 것을 말이죠. 제가 올 곳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살짝 들기도 했지만 일단은 이 자리와 이 상황이 너무 신선했고 즐거웠기에 신기한 눈길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저녁을 시켜 먹은 뒤에는 또 게임을 합니다.<런닝맨>에서 일명 양세찬게임으로 불리는 콜 마이 네임 게임입니다.
세 명씩 팀을 나눠서 총 세 번의 게임을 했습니다. 각 게임마다 승점을 부여해서 세 번의 게임을 마친 뒤 최종적으로 꼴찌를 한 팀이 뒷정리를 하는 내기가 걸린 미션이었죠.
인물을 정해서 맞추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 게임의 인물은 엘사(겨울왕국), 홍진호(전직 프로게이머 및 방송인), 칸트(철학자)로 정했는데 문제도 어렵기도 했지만 서로 답변을 구경하는 사람조차 포복절도할 만큼 모호하게 하는 덕분에 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 참고로 칸트는 제 아이디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두 번째 게임의 인물은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 ㅇㅇㅇ(동호회의 인물)이었고 큰 반발이나 지연 없이 무난하게 넘어갔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참여하는 차례였는데 이번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이름 맞히기였습니다.
고길동(둘리), 안나(겨울왕국), 철수(짱구는못말려)
보통의 성인이라면 모르기가 쉽지 않은 이름들이었는데 막상 자리에 앉아서 하려니 쉽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1박 2일이나 런닝맨에 나오는 사람들이 제작진이 준비한 다양한 퀴즈나 게임에서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비웃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제 이후로 앞으로 절대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네요.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면서 긴장감 넘치는 게임을 하는 상황 자체가 두뇌회전을 확실히 감소시키더군요.
제게 배정된 문제가 철수였는데 다행히 2등으로 경기를 마쳤습니다. 옆에서 함께 게임하던 분의 실수가 큰 힌트가 되었습니다. 제가 맞히고 못 맞히고에 따라서 뒷정리를 하느냐 마느냐가 달렸었는데 다행히 체면을 지켰네요.
세상에는 사람의 관심을 끄는 다양한 관심사들이 있습니다.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일도 있고 누군가와 함께 해야만 하는 분야도 있죠. 아이들을 키우면서 관찰해 보면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취미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관심사에 대해서도 기회를 줘보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을 방탈출카페에 데려가 본 뒤 계속 관심을 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이런 모임을 통해서 사회성이나 사교성을 기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미 비대면 시대를 한 번 경험해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인간은 살아나가기 힘듭니다. 미래 사회에서 인지능력보다 공감능력이나 사회성에 대한 부분을 높은 경쟁력으로 평가하는 것도 맥락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의 취미도 사람들과 자주 접하고 어울릴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어른들이 조금만 도와주는 것도 좋다고 보입니다. 결국 많은 기회가 있을수록 더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새로운 경험은 제 기준에서만큼은 꽤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고 싶습니다. 제가 관심이 식지 않고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는 아이들과도 함께 이 모임을 나갈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여러모로 재미있었거든요.
한 줄 요약 : 공통된 관심사로 함께 무언가를 즐길 수 있는 벗이 있다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