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최근에 상당히 슬픈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자주 입던 바지에게 불행한 사고가 생겨서였죠. 씻으려고 바지를 벗는 순간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게 되었고 그 순간 가랑이 부분에 발가락이 걸려서
쫘악!
하고 찢어지고 말았던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비틀거리면서 넘어질 뻔했다가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균형을 극적으로 잡은 덕택에 부상은 면했지만 제 소중한 바지의 손상까지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불의의 사고였죠. 얇은 폴리에스테르 재질로 여름에 입고 다니기에는 딱이었는데 그 순간 느꼈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명석한 두뇌로 고민한 결과 답은 금세 나왔습니다.
"그래! 수선집에 맡기면 되겠다!"
하지만 문제는 바지가 공교롭게 사타구니 부분이 뜯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수선집에서 어디가 뜯어졌는지를 보고 수선을 하지는 않을 테니 무슨 큰 대수겠냐 싶어서 다음 날 가져가기로 했죠.
그런데!
그런데!
제가 생각지도 않게 큰 실수를 하나 더 하고야 말았습니다.
이 상황이 너무 웃기다 보니 혼자 알고 있기가 아까워 아이들에게도 알려줬다는 사실이었죠. 신기해하던 아이들은 퇴근한 아내를 보자마자 쪼르르 달려가 이렇게 제보하고 맙니다. "엄마, 아빠 바지가 어떻게 된 줄 아세요?"라고 말이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냅다 안방으로 달려오더니 찢어진 제 친구를 보며 당장 버리라며 뺏으려고 하더군요.
저는 평소 합리적 소비자를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있던지라 아내에게 구박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그런 모습이 과할 때가 있어서 그럴 때는 꼴 보기 싫을 정도로 궁상스럽다는 이유에서였죠.
아내는 바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제게 기함을 하면서 닦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거기가 찢어지냐?"
"당신 나이가 몇이냐"
"당신도 사회적인 지위라는 게 있지 않느냐!"
"당신이 그러고 다니면 부인인 내가 욕을 먹는다"
"그 돈 아낀다고 부자 되는 게 아니다"
"그 부분이 뜯어진 바지를 수선하러 가면 창피하지도 않겠느냐"
십자포화와 같은 수준의 맹공격을 당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질 뻔했지만 저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제 귀는 상황에 따라 양쪽이 연결되는 특수한 기능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날은 제 날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아내가 아닌 더 강력한 최종 보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으니까요.
바로 저희 집에 장모님이 와계셨던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이 사실을 설마 장모님께 이야기하겠나 싶어서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장모와 사위가 서로 민망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아내는 제가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해 보이자 최후의 방법으로 장모님께 달려가 이 사실을 고자질하고 맙니다.
사건의 전말을 들으시던 장모님은 아내가 지었던 표정과 거의 똑같은 표정을 지으시더군요. 역시 피는 못 속이는 모양입니다.
"당장 사줄 테니까 그거 갖다 버려"라고 하시더군요.
아이들까지 나서서 버리라고 하니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습니다. 결국 제 소중했던 친구를 쓰레기통에 넣음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러고서 얼마 뒤 이 내용으로 글을 써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사진을 하나 찍어두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쓰레기통 안에서 바지를 잠깐 꺼내서 털고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려고 하는데 그 모습을 본 1호가 잽싸게 엄마에게 큰소리로 제보를 합니다.
"엄마, 아빠 다시 바지 꺼냈어요!!"
화들짝 놀란 저는 "아냐, 사진만 한 장 찍으려고 꺼낸 거야"라며 진땀을 흘리면서 수습을 합니다. 아내는 득달같이 달려오더니 다시 쓰레기통으로 그 친구가 사라질 때까지 매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아내, 장모님, 아이들 모두 버리길 잘했다고 합니다. 바지를 버렸다고 칭찬까지 받은 남자, 그게 바로 접니다.
결국 저는 어쩔 수 없이 내친김에 그 자리에서 온라인으로 바지를 구매했습니다. 구매내역을 캡처해서 장모님께 보내드렸더니 옷값에 쓰라고 하시며 용돈까지 주십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끝까지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죠.
그렇게 저는 새 바지를 얻게 되었죠. 지금은 아주 신나게 잘 입고 다닙니다. 떠난 친구를 그리며 시 한 수 읊조려 봅니다.
버려진 바지
바지야, 바지야.
널 쓰레기통에 버려서 미안해.
그렇게 보내지 말았어야 하는데.
의류 수거함이었다면 한결 편했을까?
그동안 나와 함께해 줘서 고마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우리 헤어지지만
함께 한 추억만은 잊지 말자꾸나.
그래도 이 글을 먼 훗날에 보면서 웃을 수 있는 날도 있겠죠? 저도 알고 보면 웃긴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사람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