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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슈페너 Nov 19. 2021

목적없는 것들

아프지만 아름다운 도시 군산


시골 마을

목적지보다는
목적지에 가다가 만난
시골 마을이 더 좋았다

시골 마을보다는
시골 마을의 사람 없는 골목이
더 좋았다.

사람 없는 골목보다는
심야에 혼자 불 켜진 라멘집이
더 좋았다.

라멘을 먹는 일보다
라멘을 먹고 돌아온 숙소의
따뜻한 이부자리가 더 좋았다.

백 년 전에 지어진 집의 삐걱이는 마루를 걷는 일.
백 년 전부터 그 자리에 놓인 낡은 반닫이 서랍을 열어보는 일.
백년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나란히 두고 보는 일.

목적지에 가서
따뜻한 음료수 한 병 사 먹고
차가운 공기 속을 걸어가는 일.

목적보다는
목적한 적 없는 것들이
언제나 좋았다.


그 좋았던 시간에       -김소연-


목적보다는 목적한 적 없는 것들이 언제나 좋았다.

자유롭지 못한 여행 보다는 여유로운 느린 여행을 좋아한다.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도 좋지만 불쑥 찾아오는 옛 친구같은 여행이 더 매력적이다.


전주는 매일 먹는 김치찌개 같은 맛을 하고 있었다.

무슨 기대를 얼마나 많이 하고 왔는지 따분했다. 궁리 끝에 이틀 째 되는 날에는 가까운 거리의 군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군산…! 단 한번도 여행의 목적지로 생각해 본 적없는 도시였다.

전주에서 콩나물 국밥을 먹고, 커피는 군산에서 마시기로 했다.




백년 전에 지어진 아름답지만 아픈 도시

신민회.* 군산의 카페 신민회는 일제 강점기때 픽박을 많이 받았던 바다 근처 ‘근대화의 거리’에 있었다.

일본식 건물에 독립 운동가의 초상화와 결의를 다지는 문구가 곳곳에 배치되어 항일 결사대가 자주 모임을 가졌을 법한 느낌을 주었다. 여기저기 휘날리는 태극기와 태극 모양을 한 과자에 이르기까지 카페의 소품 하나 하나 아픈 상처들을 ‘잊지 말라’  말하는 듯 했다.             

커피를 마시고 본격적으로 ‘근대화의 거리’ 를 걷기 시작하는데 이곳이 일본인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일본식 건축이 많았다.


여행은 이따금 무언가를 계획하지 않고 무방비 상태의 마음에 도둑처럼 겹쳐지는 순간을 위해 그 많은 걸음들을 옮기는 것 인지 모른다.

뜻밖의 만남, 우연한 행복, 낯선 추억을 만들기 위한 소박한 밥상 같은 것들.

그 옛날 거리에 있던 세탁소와 사진관 그리고 오래된 슈퍼, 일본식 사찰, 다방, 군사 항쟁관, 역사박물관….

아픈 흔적들은 반듯하게 정리된 길과 길 사이 손대지 않은 낡은 가게와 함께 마음 한쪽을 저리게 비집고 들어왔다.

거리는 ‘이제야 왔느냐’ 핀잔하는 듯하다. 걷다 보니 발견한 소박한 서점.

그곳에 한참을 머물며 책을 샀다. 신중하고 날카로운 주인의 선택이 보이는 책들. 서점과 책은 군산을 닮아 있었다.


카페 신민회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온 사진관
일본식으로 지어진 동국사의 소녀 상


몇 해 전 어느 여름날 혼자 평창에 갔었다.

점심을 먹고 숙소로 차를 몰았는데 깜박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길을 놓쳐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돌아 나올까’ 하다가 초록으로 들끓는 산속 풍경에 그만 반하고 말았다.

‘어디 갈 때까지 가보자’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좁은 산길을 꼬불꼬불 한없이 들어가는데 조금 무섭기도 하면서 재미가 있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기적 같은 선물, 도암댐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은 무서움을 뒤로하고 찾아온 나를 격려하듯 거짓말 같이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새파란 물에 취해 한참을 가는데 공사하는 아저씨들이 보인다.

“계속 가면 어디에요?”

“정선으로 넘어가요! 그런데 공사 중이라 길이 험해요!”

왔던 길로 다시 나가는데 산속 카페가 보였다.

자그마한 다리 하나를 건너니 제법 커다란 주차장과 잘 가꾸어진 정원과 커피 향이 풀풀 나는 ‘풀향기’가 있다.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한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렇게 인연이 된 곳은 평창에 가면 꼭 들르는 단골이 되었고, 오랜 친구같이 만나면 반가워하며 수다를 떨 수 있는 따뜻한 곳이 되었다.




 목적없는 길 위에 만난 것들을 사랑한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듯 달리느라 숨이 차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다리는 통증을 잊은 지 오래다. 무릎 연골도 낡아지고, 발목은 무게와 속도를 이기지 못해 버둥거린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 멈출 수가 없다. 사소해 보이는 것들의 호소는 모르는 척한다. 나아가야 한다. 앞으로 앞으로…


갑자기 누군가 팔을 잡는다. 돌아보니 ‘목적없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속삭인다.

‘라멘 먹고 가라고.’


가게 안은 따뜻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난로 위 주전자는 느리 적 거리며 차를 끓이고 있다.

그러는 사이 라멘이 나왔다.

라멘이 맛있어 좋았지만 그 뜨거운 것을 내어 놓는 주인장의 두툼한 손이 더 좋았다.


그렇게 목적한 적 없는 길 위에 만난 것들을 사랑한다.
















photo by 아인슈페너


* 신민회는 1907년에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이다. 전국적인 규모로 국권을 회복하는데 목적을 두었고 안창호의 발기로 이동휘, 이갑 등이 창건을 하고 김구, 신채호 등이 중심이 되었다.


#군산#신민회#군산역사박물관#군사항쟁관#풀향기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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