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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슈페너 Nov 07. 2021

마음이 공간을 만날 때

전주여행


전주로 가기 위한 여행의 시작이 ‘전주비빔밥’ 때문인지 ‘한옥마을’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인지 전주는 나에게 꼭 가봐야 하는 여행지 중 하나였고, 묵고 싶었던 숙소를 어렵게 예약하고 나서는 가두었던 마음들을 풀어헤쳐 전주로… 전주로 향했다.


무엇보다 그곳으로 향하는 차창 밖의 풍광은 강원도를 향해 달리던 때와 사뭇 달랐다. 생각보다 우리나라는 넓다.

동쪽으로 갈 때는 여기저기 불쑥 솟아 있는 산들이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다채로운 모양을 호기롭게 펼치고 있다면, 서남쪽으로 향하는 곳에는 지리 시간에 배웠던 호남평야와 나주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마침 추수 때가 된 들판은 황금물결이 일렁이고 아득한 지평선은 이 세상이 아닌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막힘없이 ‘너의 시야를 가두지 말라!’ 하늘과 바람과 드넓은 들판이 합심하여 말하고 있었다.






첫째 날 예약한 숙소는 평범한 골목길에 있는 상가건물 2층이었다.

상가 건물이라… 약간은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문을 열었다.


오 마이 갓!!!


인간의 상상력이란 어느 지점에 선을 긋는 순간 한계가 생기고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갈 수 없는 헛 발질에 불과한 고인 물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 한계라는 선을 과감히 넘어 버리면 근사한 상상력과 함께 망각했던 사피엔스의 본능이 살아 돌아온다. 상가건물 2층에 자리한 숙소가 그랬다.

 

하얀 도화지에 연필 하나를 쥐고 스케치를 시작한다. 쓱싹쓱싹.. 연필 그어지는 소리와 함께 선과 선 그리고 그 선들이 만나 이루어진 각각의 도형들이 탄생한다.

마침내 네모와 세모, 동그라미가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면 빛이 드리운 곳과 어두운 곳으로 공간은 구분되고 이곳과 저곳이 맞물리며 살아 움직이는 그 무엇이 되어간다.

그러한 공간은 서로를 밀쳐내고 엉켜지기를 반복하며 방을 만들고 거실을 만들고 부엌을 만든다.

그렇게 탄생한 공간에 이미지를 입히고 이야기를 덧대며 탄생을 거듭한 끝에 여행자의 쉘터가 된다.

 

출처: Olga Sorokina


전주는 한옥마을로 유명하지만 전주 이 씨 시조인 이한의 22 세손인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인지 한옥마을에는 숙소로 사용되는 한옥이 실제로 많이 있고, 꼭 한옥마을이 아니어도 한옥의 느낌을 살려 지어진 건축물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골목길 상가에 위치한 숙소는 우리의 상상력을 실험하게 하는 곳이었다.


척박한 시멘트 덩어리의 네모 안에 대들보가 가로질러 있고, 서까래를 얻어 그럴듯한 대청마루와 디딤돌을 놓았다.

여기저기에 놓인 소품은 그 옛날 누구의 손때가 묻은 것인지 살아온 세월의 질곡이 보이고, 현대의 편리함과 세련된 공간의 구성은 지나온 것과 지금의 것들이 서로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콜라보(collaboration) 하우스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곳곳에 자리한 감각적인 데코는 덤이었다.


리빙룸 역활을 하는 대청마루
세면대로 사용되는 자개 화장대
디딤돌이 놓인 빔 프로젝터
다이닝 룸

어쩜 기존의 한옥을 게스트하우스로 사용하거나 낡은 가옥을 리모델링한 것보다 느낌은 덜 할지 모르나, 인색한 공간에 한옥이라는 영혼을 불어넣은 설계자에게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침실로 들어가는 문






동굴에서 시작된 최초의 공간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지금의 공간은 인간의 생각과 가능성과 철학을 담고, 삶의 낱낱 한 생살을 담는 존재 그 이상이다.

이름 모를 여염 댁의 화장대에서 손을 씻으며, 그 옛날 누군가 써 놓았을 원고지의 흔적을 보면서 가슴 아득 뻐근한 통증을 느낀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그 좋았던 시간들 속에 때로는 삶이 우리를 속일 지라도 기어이 살아내고야 말았을 그때,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길고 긴 흔적을 남긴 다는 것을 이 짧은 여행길에서 느끼고 말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문을 나서는데 작은 여자아이가 가방을 메고 3층으로 올라간다.

“안녕?”

“안녕하세요!”

“혹시 3층에 사니?”

“네!”

“혹시 여기 2층이 너희 집이니?”

“네! 아빠가 만드신 집이에요!” 아이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와 좋겠다! 아빠가 멋진 분이네!”

아이는 우쭐하며 씩씩하게 계단을 오른다.

우리도 푸근한 마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photo by 아인슈페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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