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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슈페너 Feb 17. 2021

방구석 여행자

Armchair Traverler


어릴 적 어린 왕자를 처음 읽었을 때,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자신의 별에 있는 장미에게 상처를 받아 여러 행성을 여행한다고 했지만 그야말로 어린! 왕자! 가 사막을 헤매고, 여우와 이야기하고 뱀을 만나는 것이 무서웠다. 어린 나는 왕자가 어서 빨리 자신의 별로 돌아가 장미와 화해하길 바라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944년 정찰 임무로  비행을 떠난 작가 ‘생뗵쥐페리‘는 기지로 귀환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여행 중이거나 다른 행성에서 어린 왕자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출처: 네이버


영국 드라마 ‘더 크라운(The Crown)에서는 조종사였던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자신의 꿈을 버리고 여왕의 그림자가 되어 왕실의 일원으로 왕족이 되어간다.


일상의 지루함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을 무렵,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왕실의 그 누구보다 현장의 생생함을 황홀하게 지켜보던 그는 무사 귀환한 우주 비행사들이 전 세계를 돌며 환영행사를 하고 버킹엄 궁 또한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기대감에 들뜬 그는 시간을 빌려 비행사들과 만나기를 희망하고, 15분 간의 개별 면담시간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는 고민에 빠진다.

정해진 시간 안에 궁금한 것들을 낭비 없이 물어야 한다.

노트에 써내려 가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질문지를 완성한다.

드디어 우주비행사들이 버킹엄 궁에 도착하고 형식적인 행사를 마치고, 세 우주 비행사와 필립공이 독대의 시간을 갖는다.

꾸깃꾸깃한 메모지를 들고  질문을 시작한다.


-그곳은 어떠했는지

-처음 달의 표면에 발을 디뎠을 때 기분이 어떠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지만 젊은 비행사들은 어떠한 감동이나 드라마틱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임무를 완수해야 했고 극도의 긴장 속에 있었으며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기에 무엇을 느끼고, 감동하고,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짜인 각본 안에 ‘특별한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우주 비행사들 일 뿐이었다.

실망한 필립 공은 당황한다.

그때 비행사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이런 궁에 사는 기분은 어떤지

-이곳에 얼마나 많은 방이 있는지


부러움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궁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필립 공은 한탄한다.


-저런 애송이들 때문에 며칠 밤낮을 설치며 질문지를 써내려 가고 들떠 있었던 것이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저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물론 드라마는 철저히 필립 공의 시선에 맞추어져 있다.


                                                                                                               


예전에는 귀족이나 양반들이 직접 여행지를 다니지 않고 아랫사람을 시켜 둘러보게 한 후, 세세히 들은 이야기를 글로 적었다 한다.  

조선시대의 문인들도 직접 모든 여행지를 다녀 오지 못했고, 그림이나 글을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정선으로 대표되는 ‘실경 산수화’의 유행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선의 <금강 전도>   리움 미술관 소장



 어쩜 달에 착륙한 그들은 무사히 살아서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달에게 마음을 내어 줄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장면을 티브이를 통해 지켜보는 ‘armchair taverler’가 달의 표면에 닿은 비행사의 발끝을 느끼며 더욱 강렬히 감동하고, 실제로 달나라 여행을 하고 온 그들보다 마음의 잔치를 여과 없이 뿜어낼  있었다.


또 유명 피아니스트의 연주나 발레를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지만 웬만한 좌석이 아니고서야 무대는 멀리 있는 아득한 실체이다.

물론 실제로 그들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때로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과 발레리나의 면밀한 동작 하나, 드레스의 구슬 장식 등을 자세히 볼 수 있는 화면으로 감상하는 ‘armchair traverler’가 더 진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어쩜 우리는  ‘안락한 의자에 앉은 여행자’가 되기 위해 그 지난한 과정을 감당하는지 모른다.


어린 왕자도 우주 비행사도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는 최종 목표를 이루었고, 어린 왕자는 깊은 깨달음을 비행사는 인류에게 또 다른 희망을 선물함으로 여행의 의미를 가치 있게 승화시켰다.

 

결국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일탈이다.




나는 왜 그토록 그리도 자꾸만 떠나려 하는가.

나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내가 처한 누렇게 팅팅 불어 터진 ‘지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건가.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돌아오면 꼭 ‘집이 좋아!’로 끝나는 여행의 뒤 끝이었다.

‘왜 이렇게 좋은 집을 두고 길거리에서 고생을 했지?’

그리곤 익숙한 침대에 파묻혀 길 떠난 고양이가 어미의 품을 파고 들듯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따뜻하다.

환대받는 느낌이다.

여행의 기쁨이 모두 헛짓거리가 되는 배신의 순간이다.

짐을 풀고 사진을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 ‘armchair traverler’가 되어 내가 여행한 것을 타자의 시선으로 감상한다.   


여러 이유로 여행을 시작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기쁨을 누리지만, 집에 돌아오는 순간 우리는 안도한다.

가방을 푸는 순간, 비로소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 끝나는 것이다.


photo by 원정

메인 사진: 작품 by 강주현




* The Crown-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중 펼쳐진 정치적 투기와 로맨스, 그리고 20세기 후반 세계의 지각을 형성한 사건들을 엮어낸 드라마, Netflix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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