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by 아인슈페너

늦잠을 잤다.

졸업시험 마지막 날 지각을 하다니.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바닥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책들을 주워 담아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완전히 동이 터 오지 않았는지 밖은 푸르스름하다. 구름인지 날개인지 하얀 깃털 같은 것들이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차갑다.

진 회색 교복 치마는 혼자 좋아 나풀거리고, 흰 와이셔츠는 축축한 공기에 질척인다.

교문에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 회색 건물이 질책하듯 쏘아보고 쌀랑한 기운만이 파랗게 놓여 있다. 모두들 일렬로 늘어선 책상에 머리를 박고 마지막 한 자라도 놓치지 않으려 기싸움을 하고 있으리라.

괜스레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언제 밝아 오는 거야?

새벽 느낌의 파란 공기가 을씨년스러운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무서웠다. 시험기간이라 학교 안은 유난히 조용했고 빨리 가려고 하면 할수록 발걸음은 더 느려지는 것 같았다. 숨을 헐떡이며 교실문을 열자 예상대로 모두가 머리를 쳐 박고, 책이나 노트를 뒤적이고 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누가 지각을 했는지 관심조차 없다.


이미 진 것 같아 가슴이 폭발할 거 같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노트를 꺼냈다.

순간, 비명이 나오고 말았다.

온통 노트가 하얗다. 다른 노트를 꺼내 보았지만 또 하얗다. 이번엔 책을 꺼냈다. 그 역시 하얗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옆자리 친구가 말했다.


‘너 공부 하나도 안 했잖아’

‘뭐? 아니야! 나 공부했어!’


옆 자리 친구가 비웃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말 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한 거 같다. 아니다.

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 하나도 안 했다!


그러는 사이 하얀 시험지가 앞에 놓였다.

아무리 써 내려 가도 계속 하얗기만 한 시험지.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머리를 박고 시험지 안을 깨알같이 써 내려가기 바쁘다.

또 옆자리 친구가 말했다.


‘너 공부 안 했잖아’


교실 안은 계속 파랗고, 하얀 시험지가 노려본다.


‘너 공부 안 했잖아!’


고통스러움에 쓰러질 거 같다.



눈을 떴다.

햇살을 돌돌 말아 눈부시지 않게 하늘거리는 커튼,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침대 소리, 옆에 놓여 있는 읽다 만 책의 노란 표지.

‘졸업한 거 많지? 공부한 거 맞지? 이제 시험 안 봐도 돼지?’ 여전히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거실로 나왔다.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으신다.


“꿈꿨어?”


누가 내렸는지, 거실 안에 퍼진 커피 향이 따뜻하다.

창 밖을 보니 아이들 등굣길이 한참이다. 빨강 노랑 초록 그리고 보라색 책가방들이 봄 꽃처럼 퍼지고 모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멀리서 볼 때는 축제 같은 장면이지만, 아이보다 예쁜 가방이 더 커 보여 안쓰런 마음이 든다.

그때, 한 소녀가 보였다.

하얀 셔츠에 진 회색 치마를 입은 여고생.


'이 시간이면 지각일 텐데?'


순간 눈이 마주쳤다.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니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계신다.

다시 돌아보니 소녀는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다.

순간, 머리를 맞은 듯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꿈에서 만난 그녀.

나만 보았는지, 서로가 눈을 마주쳤는지 소녀는 무언가를 소곤거리고 있었다.

입 모양을 보려 가까이 더 가까이 창가에 달라붙었다.

소녀의 입모양을 따라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갔다.


‘나. 공. 부. 했.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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