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 올림픽이 끝나고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만남의 광장을 지나 얼마쯤 달리다 보면 ‘초월 IC’가 나온다.
이쯤 되면, 도시를 떠났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녹색의 쨍쨍한 나무들이 이불처럼 산을 덮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고립된 마음을 통과한 바람이 한바탕 소란스럽게 훑고 지나간다.
이제야 날것의 숨을 쉬는 것 같다.
달리는 차의 백미러로 보이는 도시는 뿌옇게 기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얄팍하고 간악한 도시에 시원한 싸대기 한 대를 날린다.
속이 후련하다. 인정머리 없는 도시에 복수하는 마음으로 차의 가속페달을 힘차게 밟는다.
‘나는 너를 떠나 잘 살 수 있다고!’
바람이 세차게 뒤에서 밀어주고, 빨갛게 타오르는 도시의 하늘을 사이드 미러로 훔쳐보며 달린다.
시공간의 이동을 한 순간이라도 놓치기 싫은 듯 백미러의 도시풍경과 달리는 차의 앞 창에 펼쳐지는 초록의 잔치를 번갈아 바라보며, 도시와 멀어지는 것을 자꾸만 확인한다. 현재에서 미래로 도망치는 살아있는 시간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도시를 참으로 사랑했다.
유럽을 처음 여행할 때도 스위스보다는 밀라노가 좋았다. 숲보다는 고층건물이 좋았고, 나무보다는 안락한 소파를 자연의 빛보다는 화려한 도시의 조명을 더 좋아했다. 식물을 들여와 집 한 구석에 놓으면서도 그것은 단순히 인테리어 소품과 같은 역할을 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인정머리 없는 도시 여자였다.
그런 나에게 평창은 ‘자연의 시간’을 알게 해 주었다.
자작나무 숲으로 덮여 있는 그곳은 시시때때로 다양한 모습을 하며 날씨와 시간에 따라 너무도 신비로운 형상들을 과감 없이 보여주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서는 5월의 자작나무 숲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자작나무 숲이 흔들리는 모습은 잘 웃는 젊은 여자와 같다’
‘숲에서는 젖을 토하는 어린 아기의 냄새가 난다', ‘멀리서 보면 빛들이 모여 사는 숲처럼 보인다’라고 적고 있다. 책을 펼칠 때마다 작가의 언어의 유희에 감동하곤 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거 같다.
햇살 좋은 날,
바람이 불어 잎들이 이리 젖혀지고 저리 구부러질 때면, 빛의 비늘이 번쩍이며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형상을 띤다.
‘쏴아~~’하는 이상한 신음과 함께.
그 소리를 한참 듣고 있노라면 마음은 갑자기 유순해지고, 모든 것이 다 용서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린다.
빛들이 모여 사는 자작나무 숲은 나를 그렇게 헐거운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동계 올림픽 기간 동안 여러 나라의 게스트를 맞았지만, 올림픽이라는 커다란 소정의 목표가 있었기에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올림픽을 즐기고 큰 문제없이 나의 숙소를 이용하였다. 미국에서 온 첫 손님 ‘사비나’와 같은 사례는 없었고 대부분 매너 좋은 사람들로 큰 어려움 없이 올림픽은 끝이 났다.
정식 올림픽이 끝난 후에는 언제나 ‘패럴림픽(Paralypics)-국제 신체 장애인 체육 대회’가 열린다.
사실 다른 나라에서 패럴림픽이 열릴 때에도 나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한 나의 취향? 성향? 관심 없음! 에 근거하여 패럴림픽 기간에는 이제야 마음 놓고 숙소를 이용하며 평창의 정취를 애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패럴림픽이 시작되자 나의 숙소는 꽉 차 버렸다. 그것도 모두가 외국인!
순간, 미묘한 감정이 나의 마음을 쿵! 하며 치고 달아났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뿌리 박힌 편견 덩어리가 나를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런던에 있을 때, 거리와 식당 그리고 박물관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친 수많은 장애인은 일반인과 자연스럽게 엉켜 하나의 풍경으로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회 시스템과 교육의 힘을 부러워했는데, 정작 한국에 돌아와 패럴림픽이 열리는 현장에 있으면서 당연히 손님이 없을 거라 단정 지었던 나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 기간 동안 우리 숙소는 그들의 축제 속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난생처음 에어비앤비라는 플랫폼을 통해 호스트가 되는 호사를 누리고, 올림픽을 맞아 우연한 기회에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 겨울날들.
찬 바람 속에 일렬로 늘어선 만국기는 응원이라도 하는 듯 열심히 휘날리고, 개막식과 폐막식을 담당했던 공간은 오색 빛 조명으로 반짝였다.
각국의 선수들로 들썩였던 거리와 식당, 카페는 유럽의 어느 나라에 와 있는 착각이 들게 했다.
이제 그곳은 다시 예전의 조용한 마을로 돌아갔다.
축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만국기가 휘날리던 장소는 그때의 영광을 잊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듯하다.
이제 나만의 것이 된 그곳은 오직 나를 위해 존재한다.
강물을 따라 굽이쳐 흐르는 도로와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서로의 잎을 비벼대는 빛들이 모여사는 자작나무 숲과 알 수 없는 향기로 나의 머리를 환기시켜주는 날 것의 바람, 바람, 바람 냄새.
차를 달려 도시로부터 도망친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다시 도시와 맞짱 뜰 기운을 받아 마신다.
2018 동계올림픽 기간 동안 강릉 경포 해수욕장에 전시된 작품들
photo by 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