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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슈페너 Aug 29. 2021

혼자 왔으면 무서울 뻔했어

발왕산 900m 한옥호텔

역시나 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공간의 이동은 ‘여행’이라는 조금은 과한 듯한 이름을 부치지 않아도 되는 삶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몇 해 전 혹은 몇 달 전부터 계획을 짜고 미리부터 설레며 가방을 싸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여행은 슬리퍼를 끌고 대충 싼 가방을 들고 문득 떠나버리는 ‘시공간의 이동’과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아무 계획 없이 켜켜이 묵은 때를 밀러 목욕탕에 가듯 떠나는 순간들이 통쾌했다. 이제는 때가 되면 배가 고프듯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마음이 고파왔다.


"떠날 때가 되었다고!"


어쩌면 도시를 떠나 살 수 없었던 내가 초록병에 걸리고, 파란 하늘과 숲의 나무와 산의 속살을 보고 싶어 안달 난 환자가 되어 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요번에는 조금 더 깊고 높은 발왕산 자락 한옥호텔로 숙소를 잡았다.

용평 리조트 입구 마지막 편의점에 들러 간단한 음료와 먹을거리를 샀다. 한번 들어오면 나가기 힘들다는 호텔 측의 안내를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에 넉넉히 봉투를 채웠다.




들어가는 길은 정말로 꼬불꼬불했다.

이따금씩 발견되는 호텔의 표지판이 아니라면 ‘길을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메밀밭을 지나고, 문득 길 한가운데 예고 없이 나타나는 나무를 비켜가고 계곡물이 흐르는 사잇길을 지나 아득히 펼쳐진 배추밭과 띄엄띄엄 지어진 작은 시골집을 몇 채 지나자, 기괴한 정승이 서 있는 호텔 입구가 나타났다.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체크인을 하려 했는데, 동행한 딸은 벌써 무서워한다.

여기서 호러영화를 찍으면 안성맞춤인 장소라고.

몇 해 전 친구와 잠시 구경을 와서 차 한잔을 마시고 간 곳이라 한 번의 익숙함은 나를 긴장시키지 않았지만 딸은 구중 산속의 호텔이 스산한 가보다.

산이 너무 깊다고.

우리는 체크인을 하고 객실로 들어갔다.

처마에 매달린 이른 가을과 나무 냄새가 나는 객실과 누마루가 있는 풍경은 산을 마주하며 시를 짓는 고독한 선비의 흉내를 내는 듯했다.

고요하다.

사람이 없다.

하늘과 바람과 깊은 산과 나무 그리고 한옥으로 지어진 건물이 있을 뿐이다.


한옥호텔
누마루


여름 한가운데 지긋지긋한 생각이 들면서 다시 초록병이 도지고, 도시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깊은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곳이 이곳이었다. 그리고 나의 소원대로 코로나 걱정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고 징글맞은 인간들도 없는 깊은 산속에 들어왔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철저히 깜깜하다.

아니 까맣다. 검은 도화지 한 장과 멀리 계곡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섬뜩한 바람소리.

쑤우우우우우…. 쑤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허공에 나의 손짓과 목소리가 의미 없이 퍼졌다 사라진다.

너무도 검은 산과 나무들 때문인지 이상하리 만치 파랗게 질린 하늘은 모락모락 피워 오르는 잿빛 구름을 받아 마시고 있다.

서울은 33도인데 이곳은 17도! 겉 옷을 입었지만 자꾸만 움츠려 든다. 마치 처음 보는 하늘 같다.




‘혼자 왔으면 무서울 뻔했어!’


누마루 건너 다른 객실의 흐미한 불빛과 마당의 나무들이 나를 멀건히 바라본다.

그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간간히 아이들의 장난치는 소리도 들린다.

저기에 행복이 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마당 너머 객실의 소음이 너무 반가운 나머지 우리는  깔깔거리며 따라 웃었다. 누마루 건너 툇마루에 가지런히 놓인 아빠, 엄마 그리고 아이들의 신발이 보인다.

도시를 떠나온 지 반나절 만에 사람 소리를 듣고 이렇게 반가울 수가. 더욱이 어린아이들의 소리는 산 중에 울려 퍼지는 모차르트의 피아노곡 같다. 간간히 보이는 차의 불빛과 뒤늦게 체크인을 하는  손님들. 그래 봤자 주차장엔 서너 대의 차들 뿐이다. 나는 아이들의 웃음에 의지하고, 다른 객실의 불빛을 위로 삼아 비로소 가을 입구의 산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얀 겔의 실험

덴마크의 건축가 얀 겔은 벤치를 가지고 재미난 실험을 했다. 꽃밭을 향해서 배치되어 꽃을 볼 수 있는 벤치와 거리를 향해 배치되어 걸어 다니는 사람을 구경할 수 있는 벤치 중 어느 쪽 벤치에 더 많은 사람이 앉는지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사람을 구경할 수 있는 벤치에 10배 더 많은 사람이 앉았다. 물론 이 실험에서 꽃과 사람 이외에 다른 요소가 10배라는 차이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꽃밭이었느냐, 어떤 사람이었느냐, 그날의 날씨는 어땠느냐 등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이 실험을 통해 크게 보아 사람은 그냥 자연만 보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끌린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인간이 다른 인간과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 사피엔스만의 본능 때문 일 것이다.
                                                                                                                                                                                                                           출처: 공간의 미래- 유현준 지음


공간의 미래 (page 161)


                                                                                                                                                                                                                    

나는 사피엔스의 후예임이 틀림없다.

그것도 도시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이기적 본성을 가진 사피엔스.

징글맞은 인간을 피해 산으로 도망쳤지만 이내 사람을 그리워하고 생판 모르는 남의 불빛에 의지하며 아이의 웃음으로 불안감을 해소하는 이상한 심리를 가진 사피엔스.

결국 다시 도시로 돌아가기 위해 도시로부터 도망치고, 초록의 힘을 빌려 다시 살아갈 기운을 얻는다.


샤워를 마치고 불을 끄니 어느 곳 하나 스며드는 불빛이 없다.

고요하고 또 고요한 곳, 자리에 누워 손을 흔드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의 눈과 귀를 막고 바람은 속닥인다.

‘깊이 쉬었다 가라고.’







photo by 아인슈페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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