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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Mar 15. 2023

무지하신 어르신을 대하는 무식한 젊은이와 우리들

 보행자신호에 붉은 빛이 선명했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그때 갑자기 빵 하고 짧고도 강렬한 클랙슨이 울렸다.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소리의 근원지는 번쩍거리는 검은색 벤츠였다. 벤츠는 제일 우측차로에서 노란색 우회전램프를 깜빡거렸다. 그 앞 모퉁이에는 폐지가 가득 담긴 손수레가 횡단보도와 인도를 반씩 물고 멈춰서있었다. 클랙슨은 벤츠가 우회전을 방해받자 행한 일종의 항의였다. 

 손수레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또 벤츠에서 클랙슨이 울었다. 빵빵. 이번에는 스타카토였다. 몇 초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상황에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벤츠는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빠~~~~앙. 길어진 소리는 신호대기중인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보다 훨씬 인상을 구긴 젊은 사내 하나가 벤츠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침을 찍 뱉고는 다짜고짜 고함부터 내질렀다. 대체 어디 간 거야? 여기 손수레 주인 없어요?   

 저쪽 상가에서 누추한 차림의 노인 하나가 허리춤을 추스르며 이쪽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다. 꾸부정한 허리에 관절염을 앓는지 절룩거리는 그의 입에서 가쁜 숨과 함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갑니다, 가요. 그쪽으로 눈을 돌린 젊은이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무식하게시리 차가 못 다니게 길을 막으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화장실이 급해서 그만……. 노인은 급히 손수레를 인도 위로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썼다. 도로와 인도 사이의 높은 턱은 강력히 저항했다. 그 과정에서 폐지들이 흘러내렸다. 멀거니 쳐다보던 젊은이가 또 한 번 화를 냈다. 뭐해요? 빨리 하지 않고. 몇 푼이나 번다고 이런 걸 끌고 나와서는……. 보행신호등에 초록빛이 들어왔다. 주변에 서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횡단보도를 건너 제 갈 길을 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호를 다 건넌 지점에서 돌아보니 벤츠의 뒤꽁무니가 크기를 줄였고, 겨우 폐지를 수습하고 손수레를 인도로 끌어올린 노인이 허리를 펴며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있었다.

 길을 걷는데 젊은이가 뱉어냈던 무식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건 노인을 엄청나게 비하하는 발언이었다. 노인은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정도로 정말 무식한 사람일까? 그렇다면 젊은이는 그런 말을 함부로 써도 될 정도로 유식한 사람일까? 주변에서 상황을 그저 관망만 하던 많은 사람들과 나는 어떨까?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던 생각은 마침내 무지라는 유사한 뜻의 단어에까지 도달했다. 

 둘 사이에는 사전적 의미를 떠나 뉘앙스 상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난 그 차이를 나름 분석해 정의했다. 무지는 배운 적이 없는 탓에 모르는 것이고, 무식은 배운 적이 있거나 알 만한 위치에 있음에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자면 무지는 선의의 의미가 강하지만 무식은 악의적인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존칭어를 붙여보니 크게 틀린 것 같지 않았다. 무식하신 어르신에 비해 무지하신 어르신은 어색하지 않고, 무지한 놈보다는 무식한 놈이 더 어울린다. 또 낮잡아 부르는 정도도 무지렁이에 비해 무식쟁이가 훨씬 더하게 느껴진다. 

 오늘 노인이 손수레로 차도를 막은 건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다. 하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저 용변을 시급히 해결하려 한 것뿐이다. 그의 행색이나 처지로 볼 때 그것이 범법행위임을 인지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도로교통법이라는 법의 내용도 알지 못할 게 뻔하다. 그렇다면 오늘의 노인은 젊은이의 말처럼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인 셈이다. 그런 노인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새파랗게 젊은 친구로부터 수모를 당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무식한 쪽은 오히려 젊은이였다. 없어 보이는 노인에게 드잡이 식으로 함부로 말한 것도 그렇고 다중이 모인 장소에서 여러 차례 경적을 반복해 울린 것도 그렇다. 그 모든 상황을 방관하는 자세로 일관한 우리들은 더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흘러내린 폐지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노인을 도울 생각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어 곤욕을 치르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불쌍한 노인을 외면했으니 말이다. 노인이 무지렁이라면 젊은이와 우리는 무식쟁이들이고, 노인이 무지하신 어르신이라면 젊은이와 우리는 무식한 놈들이다. 정작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노인이 아니라 젊은이였고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들이다. 무식은 비난의 대상이지만 무지는 동정의 대상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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