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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Mar 28. 2023

학교폭력 세 박자의 야합멜로디

 드라마시청은 독서만큼이나 내가 즐기는 취미생활이다. 그 중에서도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작품들을 좋아한다. 현실감이 짙을수록 작품 속으로 쉽게 녹아들어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의 공감은 다방면으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준다. 그러면서 나만의 목소리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고스란히 내 글의 좋은 모티프가 된다. 난 그렇게 드라마를 글감의 화수분으로 활용한다.

 최근 들어 이런저런 이유로 드라마와 소원해졌다. 그 관계를 복원시켜보려는 욕심에 퇴근하고 돌아온 딸애를 끌어들였다. 요즘 어떤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지를 물었다. 딸애의 대답은 거의 무조건반사에 가까웠다. ‘더 글로리’ 봐. 아빠가 딱 좋아할 스토리야.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할 때도, 볼만한 영화를 추천해달라고 할 때도 결코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던 아이였기에 난 더 이상의 대화를 삼간 채 제목을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로부터 며칠을 난 연진의 악랄함에 치를 떨고 동은의 복수심에 통쾌해하며 보냈다. 때마침 한 공직후보자의 자녀가 학창시절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매스컴을 통해 흘러나왔다.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축소 은폐하기 위해 후보자가 다방면으로 개입했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학교폭력문제가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건만 드라마 탓에 난 훨씬 더 분노했다. 또 다른 동은이 어디선가 나타나 처절하리만치 복수해주는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건 남의 일이 아닌 내 가족의 문제일 수 있다는 공감에서 비롯되는 행위였다. 

 누구나가 자신에게는 관대한 법이다. 때문에 우리는 늘 자신이 악인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자신만은 절대 연진과 관련이 없으며 동은의 편이라 확신한다. 불행히도 그건 사실과 다르다. 학교폭력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냉철하게 살펴보면 그 사실은 명확해진다. 학교폭력은 세 박자의 야합 멜로디다. 가정과 사회의 경쟁심, 학생의 이기심, 학교의 무관심이 바로 그 야합의 주체다. 여기에 이견을 표시하는 사람이 있을까? 또 우리나라 사람치고 그 세 가지 속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렇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연진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셈이다.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다. 가정도 마찬가지지만 일단 어디든 나서면 누군가와 대면을 하고 살아야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경쟁이 발생한다. 욕망이라는 본능을 가졌기에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우리나라에서는 그 정도가 과도해진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느냐 항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사회적 책임을 피하려는 교묘한 핑계일 뿐이다. 그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는 지도자들을 뽑는다. 그러나 선택된 지도자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경쟁을 부추긴다. 세상은 우수 집단중심으로 재편된다. 덩달아 가정에서도 자식들을 그 집단에 포함시키려 경쟁만을 강조한다.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경쟁에서 지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세뇌시키기까지 한다.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부모가 직접 나서기도 하고 끼리끼리 그룹을 만드는 일도 불사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암시도 숨기지 않는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점점 이기적이 되어간다. 그들의 교과서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측은지심(惻隱之心), 인지상정(人之常情) 같은 말들을 찾아보기가 힘들고 유아독존(唯我獨尊), 아전인수(我田引水), 독불장군(獨不將軍) 같은 말들만 가득하다. 그들에게 경쟁의 목적은 무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남의 것을 뺏기 위함일 따름이다. 여기서 폭력은 싹이 튼다. 

 학교폭력은 학생들 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사를 향한 학생들의 폭력도 무시할 수 없다. 공교육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학원 중심으로 입시준비가 이루어지다보니 어느 순간 교사에 대한 신뢰는 무너져 내렸다. 선생이 선생 같아 보이지 않으니 학부모와 학생들로부터 속된 말로 개무시를 당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담탱이나 꼰대로 지칭하거나 별명을 예사롭게 부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꾸중을 참지 못하고 대드는 아이가 있나 하면 심지어 여교사에게 성적수치심을 안겨주는 언어폭력을 자행하는 놈들도 있다. 그뿐이 아니다. 거기에 보조를 맞추며 시도 때도 없이 학교를 들락거리면서 자식을 옹호하려드는 학부모들의 성화 역시 교사를 위축되게 한다. 반면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때도 있다.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야 드물지만 감정을 자제하지 못한 상태에서 욕설을 한다거나 부적절한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교권추락의 일등공신들이다. 무너진 교권은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 간 벌어지는 폭력에 눈감고 귀 막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학교폭력이 이루어진 후 수습하는 과정에도 문제가 많다. 이번 공직후보자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런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가해학생에 대한 처벌수위가 과연 합당한지 그리고 그 절차가 투명한지에 대해서는 오가는 말들이 많다. 그만큼 의문이 크다는 뜻이다. 그 어떤 승부도 승자와 패자가 모두 수긍하지 않는다면 정당성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정당성이 사라지는 순간 처벌은 하등 의미가 없어지고 문제의 재발방지는 요원해진다. 또 피해학생에 대한 구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흔히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치유하는 것으로 모든 보상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다. 어느 수준까지를 정신적 피해로 간주할 것인가를 두고도 갑론을박이 벌어지겠지만 그건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겪는 인격적 피해는 훨씬 더 크다. ‘더 글로리’에서 보듯이 피해자는 평생을 모멸감 속에서 살아간다. 이를 해결하지 않는 한 피해자들은 두려움 속에서 떨며 피해사실 밝히기를 꺼릴 게 틀림없다. 

 따라서 학교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가정과 사회, 학교, 학생 모두가 바뀌어야 한다. 우선 지도자들은 경쟁을 위주로 하되 경쟁이 전부가 되는 사회를 지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야한다. 그런가 하면 정부와 국회는 교권을 수호할 수 있는 권한을 학교와 교사들에게 제공하고, 교사들은 흔쾌히 권한에 맞는 자질평가를 수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능력을 입증해야한다. 권한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또 일벌백계의 효과가 확실하도록 단호하면서도 강력한 처벌규정과 피해자에 대한 구제방안이 명확한 법안에 대한 입법도 서둘러야 한다. 이 모든 사항들은 국민적 합의 하에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걸 이루어내기 위해 우리는 내 자식, 우리 가족들만 옹호하려는 생각을 버려야한다.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편법을 동원하거나 부적절한 여론을 형성하려해서도 안 된다. 정정당당한 절차 속에서 깨끗이 결과에 승복해야한다. 

 학교폭력문제는 어느새 임계점에 이르러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해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해서도 안 되며 외면해서도 안 된다. 정부는 정부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또 우리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이제 더는 동은과 연진 같은 학생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 비록 재미있는 드라마 속에서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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