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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Apr 04. 2023

한 달에 하나씩 버려 가벼워지기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다. 집 안이지만 굳이 일기예보를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실내온도가 22~3도를 오가면서 한결 한기가 가시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며 행동들도 가벼웠다. 아침운동을 나가기 위해 운동복을 찾다가 오늘부터는 옷차림을 좀 바꿔보리라 마음먹었다. 따뜻해진 만큼 두꺼운 옷이 아니어도 달리는 에너지만으로 체온보상은 충분할 것이다. 상하의 모두 트레이닝복을 벗고 반바지 차림에 티셔츠를 찾아 입었다. 핫팩은 말할 것도 없고 장갑이며 비니모자도 던져버렸다. 몸놀림이 가뿐한 게 왠지 체중이 쑥 줄어든 기분이었다. 

 하천변을 달렸다. 세월이 갈수록 봄이 게으름을 부린다 생각했지만 올해도 봄은 제 시간에 맞춰 와있었다. 오늘따라 날씨도 맑았고 미세먼지도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달리며 찾아온 봄을 향유하고 있었다. 상쾌했다. 겨우내 늘 부담만 안겨주던 달리기였는데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편안함이었다. 

 어쩐지 보폭이 길어지고 걸음수가 늘어난 듯했다. 호흡도 안정적이었고 땅을 박차는 발걸음에도 힘이 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스마트워치가 알려주는 오늘의 내 몸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심박수도 구간별 기록도. 욕심이 슬슬 생겼다. 이 정도라면 근래 들어 최고기록을 경신할지도 모른다. 오버페이스야말로 가장 경계해야할 놈이지만 한 번 도전해볼만하다는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반환점을 돌면서부터는 더욱 기록을 의식했다. 몸 상태에 크게 변화가 없었음에도 기록은 여전히 호조였다. 기대는 점점 커졌다. 목표지점을 불과 1킬로미터 앞둔 지점에 이르자 막판스퍼트를 가동할 수도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서서히 속도를 끌어올렸다. 다소 호흡이 거칠어진 면은 없지 않았지만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마침내 골인했다. 기록을 확인했다. 평소보다 5분이나 단축되어있었다. 킬로미터 당 환산하면 30초를 줄인 것이니 대단한 기록이다. 

 곰곰이 원인을 분석해보았다. 나의 체력이 갑자기 좋아질 리는 만무했다. 해답은 바로 봄이었다. 운동에너지가 동일하면 질량과 속도의 제곱 사이에는 반비례관계가 형성된다. 봄의 따뜻한 기운이 나의 옷차림을 가볍게 만드는 바람에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의심을 버리지 못해 집으로 돌아와 오늘 벗은 옷가지들의 무게를 재보았다. 옷이며 장갑과 모자, 핫팩까지 모두 저울 위에 올렸더니 무려 1킬로그램에 육박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였다. 

 문득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툭툭 털어버리면 훨씬 가벼운 발걸음을 할 수 있으련만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은 채 살다보니 힘들어지는 것이리라. 실상 우리는 갑옷으로 무장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 갑옷은 워낙에 견고하기도 하고 오래된 것이어서 마치 피부처럼 체화된 것이다. 비단 부와 명예에 관한 욕심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집착과 미련, 불필요한 걱정과 근심, 타인보다 비교우위를 점하려는 욕망,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갑옷의 원재료들이다. 문제는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본능에 가까운 그것들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없다는 점이다. 

 간단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 끝에 난 일월일기(一月一棄)라는 목표를 세웠다. 무엇이 되었든 내 몸에 끈질기게 붙어있는 것 중에서 한 달에 하나씩 버리기로 한 것이다. 영원히 버리기가 어려워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생길까봐 버림의 기간은 최소한 그 달 한 달은 무조건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대상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어도 상관없다. 나를 구속하고 속박하던 것이면 충분하다. 대신 구체적이면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먼저 가장 쉬운 습관에서부터 출발하기로 했다. 그동안 내가 키워온 좋지 않은 버릇이 얼마나 많던가.  

 첫 번째로 이번 달에는 무알콜맥주를 버리기로 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맥주는 나에게 최고의 기호식품이었다. 한 잔 두 잔 즐기는 맥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양과 횟수를 늘려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마트에서 좀 색다른 외국산 무알콜맥주를 만나게 되었는데 의외로 맛과 향이 나에게 잘 맞았다. 은근히 음주량이 걱정되던 나는 맥주의 종류를 그것으로 바꾸었다. 무알콜이라는 점에서 음주량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안심요소로 작용해 양이 조금씩 늘어가는 문제가 생겼다. 무알콜이긴 하지만 그 속에 함유된 탄산은 나의 지병이다시피 한 역류성 식도염을 악화시켰고 이젠 그것이 외려 나를 괴롭히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내가 첫 번째 버리는 과제로 무알콜맥주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버리는데 성공하더라도 곧 요요현상이 생길지도 모르고 또 다른 더 나쁜 버릇이 찾아오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버리고 버리다보면 가벼워지는 날은 반드시 오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오늘 내가 겨울옷을 벗어버림으로써 최고의 기록을 달성했던 것처럼 하나씩 버려진 나의 나쁜 습관들은 언젠가 나를 인생 최고의 전성기로 인도해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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