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오후에 소일삼아 카페나 다녀오지 않을래? 지루한 일상을 타파하기 위해 아내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마주앉아봐야 둘이 정겨운 모습을 보이며 알콩달콩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아니었기에 함께 카페를 간다는 것이 큰 의미는 없었다. 찻잔을 앞에 놓는 순간 아내는 아내대로 인터넷 서핑이며 독서를 즐길 게 뻔했고 나는 나대로 또 글을 쓰거나 며칠 앞으로 다가온 우리들의 여행계획을 짤 것이 뻔했다. 동행을 권유한 건 어딘가 외출할 때마다 오가는 길의 벗으로 삼아온 오랜 습관 탓이었다.
오늘은 바빠. 그동안 당신하고 싸돌아다니느라 밀린 집안일들이 많기도 하고 내일 아이들이 집에 온다는데 밥이라도 한 끼 해먹이려면 장도 좀 봐야 해서. 그랬다. 내일은 일요일인데다 내 생일이라 두 시간 거리에 살고 있는 아들내외가 집으로 올 예정이었다. 아내의 거절이 못내 서운했지만 집안일이라고는 손도 까딱 안하면서 오히려 아내의 일손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난 구태여 서운한 감정을 입 밖으로 뱉어내고 말았다. 알았어. 아들만 중요하다 이거지? 사실 그건 아내를 향한 불만이 아니라 거절을 당한 무안함을 지워보려는 일종의 방어기제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침운동을 하고 막 들어온 몸이라 욕실로 향했다. 비누칠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바깥에서 아내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샤워기의 꼭지를 틀어 잠그며 대답했다. 아침은 식탁 위에 차려놓았으니 나오면 먹어. 난 잠깐 자전거 타고 마트에 다녀올게. 알았다는 대답으로 우리의 대화는 끝났지만 오후에 장을 보러간다 하고서는 아침부터 설쳐대는 품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사라졌다. 함께 장을 볼 때마다 녹음기처럼 늘 반복하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연어는 여기서 사면 안 돼. A마트에 가면 삼천 원이나 더 싸. A마트에 가면 그 말은 또 바뀌었다. 돼지고기는 B마트가 최저가야. 마트마다 특가상품 품목이며 가격표를 줄줄이 외는 아내였으니 최저가를 향해 마트순례를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루 동안 돌아야 할 마트가 많으니 오전 오후로 나누어 방문계획을 짠 것이겠지.
점심을 먹고 난 후였다. 거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지금 안 나갈 거야? 난 준비 끝났어. 아내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어 거실로 나갔다. 채 거실에 도달하기 전에 아내는 외출 때마다 들던 가방을 어깨에 멘 채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니 오늘 바쁘다 했잖아. 그래서 오늘 하루는 방콕하려 마음먹고 있었는데? 여전히 의구심을 버리지 못해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며 아내가 환하게 웃었다. 무슨 소리야. 아까 마트 다녀온다 했잖아. 당신하고 카페 가려고 아침부터 자전거 페달을 엄청난 속도로 밟으며 갔다 왔구먼.
아내는 아침에 나의 제안을 거절하면서도 내 표정을 일일이 살피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내가 그다지 크게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았기에 의도적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아마 스쳐 지나는 느낌으로라마 언짢은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다. 잠시 무안함에 사로잡혔던 것은 사실이니 미세하나마 표정에 변화가 있었던 것이겠지. 중요한 건 아내가 그런 것까지 캐치해낼 정도로 나를 주의 깊게 살폈다는 점이다. 그건 말을 뱉는 순간 혹시라도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걱정한 증거나 다름없었다. 바쁘다면서도 저렇게 외출준비를 하고나선 걸 보면 그 보상심리가 작동한 것이리라.
난 하던 일을 멈추고 후다닥 가방을 챙겨 나섰다. 나 또한 무언가로 아내에게 보상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언뜻 떠오른 것이 커피였다. 좋아. 오늘 커피는 내가 쏜다.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아내가 또 한 번 웃었다. 오후에 커피 마시면 잠 못 잔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난 커피 말고 고구마라떼 먹을 거야. 그때서야 나는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길과 아내를 바라보는 내 눈길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반면 아내는 지금 내가 이렇게 미안해한다는 걸 눈치 채고 또 다른 자신만의 보상심리를 발동시키는지도 모른다.